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03년 수정판의 신학적 문제점

부제: 대신과 백석교단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비교

신원균 목사. 개혁신학포럼 학술위원. 조직신학(Ph.D.)


서론

역사적 정통 개혁파 신학은 본 교단 헌법 선언서에서 “개인 신앙의 주관적 학적 표명(表明)이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회의 교회성을 본질로 하는 교회신조(交會信條)에 의한 객관적 학적 표명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신조의 채택과 보존을 통해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는 이 신조를 변형시키며 축소하여 제거하려는 무수한 도전을 받았다. 특히 도르트 총회(1618-1619)에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벨직 신조와 같은 개혁교회의 신조들을 수정하여 인본주의적 신앙을 확장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오늘날도 정통 신조들을 인본주의적으로 수정하려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인본주의적 수정의 도전은 결국 1903년에 이르러서 예전에 정죄했던 신학사상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수정을 통해서 버젓이 담아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급기야 이들은 이 신조의 수정에 만족하지 못하고 종교다원주의 역할을 하는 WCC운동을 통해 오순절파, 루터파, 로마 카톨릭, 성공회, 정교회, 신복음주의 등과 장로교가 연합할 수 있는 새로운 신조를 작성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폐기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본 글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각 나라와 교단마다 어떻게 채택하고 또한 수정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 1647년 초판에 기초해서 바른 수정의 방식을 확립한 정통 개혁파 교회의 입장과 초판을 알미니안주의와 자유주의에 기초해서 변형시킨 1903년 수정판의 차이점을 드러내어 신조의 올바른 채택과 보존에 대한 규범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본론

1. 미국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채택 과정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수정요구는 그것이 만들어진 직후부터 계속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수정요구 이면에 내포된 의도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초판의 에라스투스주의적 잔재를 제거하는 차원의 수정도 있었지만 친구처럼 다가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것으로 변질시키는 알미니안주의적인 요구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로 미국에서 2-3차 대각성 운동으로 인해 교파 간에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것이나, 1903년 신조의 수정으로 3년 후에는 알미니안적인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연합을 한 것 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스스로 개혁된 진리를 포기하고 종교개혁 이전의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 치는 것과 같다.

1620년에 플리머스에 상륙한 순례자들은 본국을 떠나기 얼마 전 영국 교회에서부터 분리한 자들로서 회중교회파와 같은 교회정치형태를 수립하였다. 또한 1628년에 오기 시작한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를 이탈하지 않고 내부에서 개혁하고자 한 자들로 감독제를 원하는 자들이었는데 결국 회중정치 제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떠나온 장로교도들은 1729년 대회(Synod)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정식으로 신앙의 표준으로 채택하였고, 특히 20장, 23장의 일부를 수정하여 세속권력이 개인의 신앙에 대해서 간섭하고 박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1차 부흥운동의 여파로 분열했던 신파(뉴욕대회)와 구파(필라델피아대회)는 1758년에 1741년의 분열이후 재 연합하였다.

1789년에는 미합중국 장로교(PCUSA)가 창설되었다. 이때 헌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생활의 필요하고도 기본적인 조항을 내포하고, 성경이 가르친 교리의 조직을 포함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대·소요리문답에 서명할 것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들은 새로운 미국의 “하나님의 예배를 위한 지침서“(Directory for the Worship of God)를 채택하기도 했다.

2차 대각성운동(1798-1801)이 무르익었을 때 신비주의적 부흥을 수용한 컴버랜드 노회는 목회자 수급을 이유로 신조의 교리적 내용을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목사들을 임직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예정론은 운명론을 가르친다고 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결국 신조에 대한 엄격한 채택과 보존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느슨한 채택과 수정을 요구하던 컴버랜드 노회의 대다수는 1810년에 알미니안적이며 신비주의적 입장을 수용하는 새로운 종파(컴버랜드 장로교회)를 창설하였다. 미국의 장로교회도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한 태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혼돈 속에서 점차 변질되어져 갔다.

특히 1837년에 2차 부흥운동의 영향의 받은 장로교회들이 장로교회의 사명과 교리, 예배, 치리기구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반대되는 “오번선언”(The Auburn Affirmation)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1924년에 진보주의 장로교 목사들이 오번신학교에 모여서 성경무오설, 성육신의 처녀탄생, 대속의 죽음, 육체부활, 기적의 역사성을 부인하며 1274명이 서명한 선언이다. 이처럼 1920년대의 미국장로교회의 자유주의와 싸움은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한 거부와 맞물려 있다. 그 결과 1837-1838년에 미국 장로교회는 구학파(Old School)-신학파(New School)의 분열을 맞는데 이것은 신학, 정치, 개혁, 특별히 노예제도 문제에 대한 다른 견해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열을 맞게 된 내면적이며 신앙적인 핵심원인은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한 엄밀한 채택정신과 느슨한 신조의 채택정신의 마찰이었다.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19세기 후기에 미국장로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와 성령운동에 대해서 새로운 강조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1889년의 총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개정하자는 동의를 15개 노회로부터 받게 된 배경이다. 1890년 총회에서는 그 사업에 대한 위원들을 세웠고, 1892년 총회는 각 노회에게 찬성할 초안을 제출하였으나 A. 핫지나 워필드나 메이첸 등의 반대로 노회의 ⅔이상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02년과 1903년에 와서는 수정안이 통과 되었다.

1903년에 미국장로교회(PCUSA)는 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모든 유아 사망자의 구원받는 것과 성령 하나님과 전도자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장을 포함한 7개 수정안을 수용하였다. 이 수정작업은 알미니안적인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1906년에 통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결국 느슨한 신조의 채택과 인본주의적 수정요구는 헌법이나 목사안수에서 형식적으로는 고백하지만 목회현장에서는 점점 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무시하고 왜면하며 실제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1차 세계대전, 대공황, 여성의 지위문제 등 교회는 많은 사회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사회문제들에 대한 답변으로 1903년 수정판은 신학적인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느슨해진 신조의 채택은 급기야 1915년에 미국장로교회(PCUSA)가 여성을 집사로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1930년 총회에서는 첫 여성 시무장로를 선택하도록 허락했다. 이런 면에 있어서 미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공적 직임을 죄로 고백해 왔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입장을 더 벗어났다.

결국 연합장로교인들은 1925년에 낸 성명서에서, 1640년대의 웨스트민스터 표준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하여 장로교인들에게 절대화되고 최종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이 때 메이첸은 1920년대에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이 뉴욕의 유니온(Union)신학교를 거쳐 북장로교회에도 침입하는 것을 보았다. 자유주의로 부터 프린스톤(Princeton)신학교를 지키려 했던 메이첸은 학교로부터 파면당한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즉 메이첸은 교회가 역사적 정통 개혁파교회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고백의 채택에 있어서 보다 더 엄밀하고 철저한 채택을 주장하였고, 이 주장 때문에 그는 전체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잘못된 수정과 느슨한 채택으로 총회는 교리와 복음의 강조보다는 교회부흥과 선교와 생활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총회는 1932년에 “평신도의 해외선교 연구”(Laymens Foreign Mission Inquiry)를 출판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학교와 병원, 또 다른 그리스도교 박애주의적 기관들의 설립과 같은 선교기관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실천의 필요성을 더 강조하였다. 또한 1929년에 시작된 공황에 대해 남장로교회는 “사회신조”(Social Creed)를 채택하여 남부와 국민의 필요에 대응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대하면서 장로교인들은 사회적 위기에 대한 답을 정통 개혁파 신조에서 찾지 않고 1934년 칼 바르트에 의해 작성된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 of Faith) 등에 의존하며 “신정통주의”의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개혁교회는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잃어버리고 온갖 다양한 혼합적인 성격의 신앙으로 물들어 갔다.

1950년 초에 미국북장로교회(PCUSA), 남장로교회(PCUS), 북미연합장로교회(UPCNA)는 장로교 연합에 대한 계획에 착수했다. 1958년 미국장로교회와 북미연합장로교회의 총회가 피츠버그에서 함께 모여 미국연합장로교회(UPCUSA)를 형성하였다. 새 교단은 형식으로나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신앙의 표준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교단은 북미장로교회가 1925년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새로운 신앙고백의 필요성에 대한 가능성을 표현했던 것을 지지하면서 새 신앙고백의 작성을 동의했다. 1956년 미국장로교회(PCUSA)에서는 여성안수를 결의하고 마가렛 토너(Margaret towner)를 첫 여성목사로 안수하였으며, 남장로교회도 1964년에 여성 목사를 세웠다.

이 시기에 성적(性的)해방, 인종문제, 가난문제, 전쟁과 평화에 대한 많은 문제들은 장로교회로부터 신학적 답변을 요구하였다. 19세기 중엽 이래 하나님과 인간 본성, 그리고 운명에 관하여 장로교회는 무엇을 믿는지에 관해 새로운 성명 발표를 북미연합장로교회(UPCNA)가 1925년 했던 것 같이 미국장로교회(PCUSA)는 1903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하여 간단한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남장로교회도 1962년 다른 간단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런 성명서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조 초판(1647)에 기초하기 보다는 1903년 수정판에 기초하여 사회복음과 정치신학적인 세속화 신학을 확장시켰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변형과 쇄락은 미국장로교회가 1967년 새 신조를 작성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장로교인이며 알미니안주의자인 에드워드 다위(Edward Dowey)는 새로운 신앙고백서의 초점을 바르트 신학의 핵심인 “화해”(reconciliation)에 맞추었다. 그는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스코틀랜드 신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2 스위스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소요리문답, 바르멘 선언을 포함하는 “1967년 신앙고백서”를 제안했으며, 대요리문답은 제거해 버렸다. 형식적으로는 전통적 신조들을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1967년 새 신앙고백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대체하는 대표적인 신앙고백서로 미국장로교회에 자리 잡았다. 이제 미국은 정통교회가 지켜왔던 개혁교회의 신조들이 교회에서 거의 사라지고 자유주의의 신조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1) 1729년 수정판

스코틀랜드 계통의 미국의 보수주의적 장로교회는 모든 목사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서명한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총회에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 의견은 여러 교회로부터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교회들은 교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오직 성경만이 충족한 표준이라 주장한 반면에 스코틀랜드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출신 목사들은 본국의 전통을 따라 교회의 교리적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장로교 표준문서에 서약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주장 하였다. 본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사람들은 신앙고백에 기명하려는 보수주의적 입장 이었으나, 영국 본토에서 온 사람들은 보다 더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져 이것을 반대하였다. 이것에 대한 중제가 J. 디킨슨의 ‘채용법령’이다. J. 디킨슨은 영국 청교도 요소를 대표하고, 존 톰슨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요소를 대표했다. 디킨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의 율법을 해석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것은 그의 마음과 뜻을 연구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전 경륜을 선포하도록 그 적용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게 한다. 그러나 무오를 주장할 수 없는 이것은, 그 해석을 부과할 아무런 권위도 가질 수 없다. 또한 그 해석이 자기에게 올바르고 참이라고 하는 것 외에 어떤 사람도 절대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수 없다.


위의 언급에서 보듯이 신조채택에 좀 더 자유로운 입장을 지닌 회중교회는 성경만을 강조하고 성경의 해석학적 규범으로써 신조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에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는데 대한 대회의 책임과 관련하여 톰슨은 성경해석의 규범으로써 엄밀한 신조의 채택을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자,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는 무엇과 같을까?.... 나는 우리가 매우 방어할 수 없는 상태에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대회의 결의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된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또는 우리 중 누군가가 그 신앙고백서에 서약하지 않거나 또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며, 교리적인 것에 부패한 자들을 목회에서 제거하는데 사용될 제도적 장치가 없게 된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부패와 교리를 포기하지 않은채 목회에 영입될지도 모른다. … 알미니안주의, 쏘시니안주의, 자연신론, 자유사고 등이 기성교회나 분리한 교회를 막론하고 개혁파 교회위에 이 정도로 홍수처럼 범람하는 때, 우리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이유를 갖지 못한다는 말인가?


1729년 대회에서 23장(3항), 31장(2항)의 교회문제에 대한 국가적 위정자의 권세를 만장일치로 거절하였다. 1736년에 교회가 신앙고백서에 어느 정도까지 충실해야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대회는 국가적 위정자에 관한 예외조항은 인정하고 동시에 거의 아무런 변화나 변경없이 신앙고백서의 바른 교리들을 대회가 충실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수정작업은 성경에 근거한 바른 수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1647년 초판 중 약간 아쉬운 부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소집이 의회에 의해서 소집되었던 것과, 교회회의의 소집권을 위정자에게 준 것과, 신앙의 문제들에 있어서도 교회에 대한 간섭을 약간 열어 놓은 부분이다. 1729년 수정은 이것을 바로 잡은 것이다.

A. 핫지도 이러한 수정작업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대회는 에라스투스적 오류에 가깝다고 인정되는 것은 일체 제거했지만 국가적 교회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는 미국에서 항상 거부된 점, 즉 정부관리들의 권한과 종교문제에 관한 견해가 있었다”라고 평가하며 국가의 총회 소집권과 교회치리권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은 신앙고백에 있는 문자와 의미까지의 수용을 합의하는 ‘엄격한 서약’을 뜻하는가, 아니면 그 중요한 교리에만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느슨한 서약’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1729년 채택과정에서도 디킨슨과 같은 느슨한 서약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C. 핫지는 “이러한 느슨한 원리는 모든 훈련의 나태함을 낳으며, 교회의 순수성을 파괴하며, 결국 영속적인 갈등이나 죽음과 같은 무관심만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일 것임이 틀림없다”라고 지적하며 신조에 대한 느슨한 서약을 경고하였다.

1729년 9월 19일 오전에 대회는 ‘예비안’을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대회의 회원 각인이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모든 조항”에 서약한 것을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오후 대회는 “거리낌”을 선포했다. 본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0장과 23장에 있는 구절들로 국가 위정자들이 대회에 권위를 행사하는 일과 교회 권징을 행사하는 권위를 가진다고 하는 구절들이 유일한 거리낌으로 선포되었다.

1729년 채택안에 따르면 미식민지 장로교회(미합중국 장로교회)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목사나 목사후보생은 반드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오직 신조 제20장과 제23장에 있는 국가적 위정자와 관련한 구절에 대해서 만큼을 “거리낌”을 표명할 수 있었는데,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항에 속하지 않는 거리낌의 수용 여부를 자기가 속한 노회나 대회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1729년 채택안에 대해 A. 핫지는 엄밀한 채택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신앙고백서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리의 체계를 담고 있는 것으로 채택하는 것을 고백함에 있어서, 사람은 모든 다른 것에 반대하여 그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전체로 연속된 교리들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즉, 그는 쏘시니안, 펠라기안, 준펠라기안, 알미니안, 또는 기독교에 반대되거나 조화되지 않는 어떤 견해에도 반대하여, 칼빈주의 체계를 이룩하고 있는 전체로 연속된 교리들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결국 1729년 수정판은 대회를 통해서 모든 목사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에 서명해야 한다는 규칙을 채택하는 성과를 만들어 냈다. 이처럼 미국장로교회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개혁교회는 신조와 함께 세워져야 한다는 신념을 정착시켰다. 하지만 회중교회를 중심으로 느슨한 서약을 요구하는 중도적 태도들도 감추어져 있었다.


2) 1788년 수정판

1788년 대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요리문답을 교회와 국가의 독립한 새로운 미국의 원리에 일치한다는 것으로 채택하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규칙서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을 새롭게 받아들였다. 소요리문답, 교회정치제도, 권징서 등은 재 조직된 교회의 표준이 되었다. 이때부터 장로교회는 안수받는 목사와 장로에게 “당신은 이 교회의 신앙고백서를 성경에 가르친 교리를 포함한 것으로 신실하게 받고 채용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것을 요구하였다.

1788년 대회는 22장 3항, 23장 3항, 31장 2항을 수정하였다. 그러나 1788년에는 예외적으로 “비상의 경우”나 “양심문제”가 걸린다면 신앙고백에 의해 허용되거나 또는 시정 당국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요청하는 길을 열어두었다. 대회는 또한 고백으로부터 장로교인들은 거짓종교(로마 카톨릭)를 관대하게 대해서는 안된다고 훈계했던 것을 제거하였다. 이런 수정에 대해서 제임스 스마일리 “이것은 장로교인들이 공식적으로 과거보다 더 관용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로마카톨리과도 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라고 비판한다. 각 수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22장 3항

“그와 동시에 합법적인 권위자가 선하고 옳은 것에 대한 맹세를 요구할 때 그 맹세를 거절하는 것은 죄다”라는 내용을 삭제하였다.


(2) 23장 3항

(수정 전 1647년판)

국가 위정자는 주의 말씀을 주관하거나 성례전을 집행해서는 안된다. 또는 하나님의 나라의 열쇠의 권세를 사용할 수도 없다. 그러나 교회의 질서를 조장하고 따라서 통일과 평화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진리가 순수하게 또는 하나도 빠짐없이 보존되며 모든 불경건한 자와 이단을 억제하며 모든 부패와 예배나 훈련에 있어서의 악용을 방지하거나 개혁하고 하나님의 모든 제도가 정당하게 조직되고 집행되고 지켜져 나가도록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관공리의 의무이다. 이일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그들은 회의를 소집하고 거기에 참석하고 무엇이든지 거기서 처리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처리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수정 후)

국가 위정자는 그들 자신의 말씀과 예전을 취급할 행정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늘 왕국의 열쇠를 취급할 권세도 가지지 않는다. 하물며 믿음에 관한 일에 간섭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양육하는 아버지와 같이 어떤 한 교파에다 다른 교파보다 우선권은 부쳐 해 주는 일이 없이, 우리의 동일한 주의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공무원의 임무다. 모든 신자들이 폭력에나 위험에 부딪치지 않고 그들의 성스러운 기능의 모든 부분은 발휘할 수 있는 충분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유를 즐길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 안에서 정규적인 치리회와 훈련책을 정하셨으므로 어떠한 국가의 법이라도 교회의 어떤 교파의 자발적인 회원들에 간섭하거나 방해를 해서는 안된다. 국가 위정자가 할 일은 아무도 종교의 구실로나 불신의 이유로 괴로움을 받지 않도록 그들의 모든 시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신앙을 지켜주는 동시에 어떠한 다른 사람에게든지 냉대나 폭력이나 악용이나 손상을 주지 않도록 지켜주며, 모든 종교적 교회적 모임이 방해나 소란을 받지 않고 가질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리는 일이다.


수정 후의 고백서는 노회나 총회에 대한 소집권을 더 이상 위정자에게 주어지지 않게 했다. L. 벌콥도 그의 조직신학(교회론-교회의 권세)에서 개혁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독립된 정치와 권징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그러면서 루터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권징의 시행을 위정자들에게 맡긴 에라스투스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의 교회와 종교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이 소집권이나 치리권과는 다른 성격을 갖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프랑스 신앙고백서 Ⅷ. “정부의 권위” 부분에서는 위정자가 십계명의 2판(5-10)뿐만 아니라, 1판(1-4)도 어기는 범죄를 제지할 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 24조 “관공리에 관해서”에서도 왕후, 군주, 관리는 우선 근본적으로 종교의 보존과 정화를 위한 임무를 가진 것으로 보면서, 우상과 미신의 박멸을 위해 정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벨직 신앙고백서 제 36조 “관공리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개혁교회 신조들은 이 두 문제를 분리하여 생각한 것이다. 즉 교회회의 소집권과 치리권은 교회의 권리를 간섭하는 행위로 판단했지만 다만 위정자들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종교적 임무와 책임은 소극적이지 않고 매우 적극적으로 확대 적용시켰다.


(3) 31장 대회와 회의에 관하여

수정 전(1647년판)

1항 교회가 더 좋은 통제 기관을 가지고 덕성의 함양을 위하여 소위 대회나 회의와 같은 모임이 필요하다.

2항 국가 위정자들은 종교 문제에 관하여 의논도 하고 충고를 받기 위하여 목사나 그의 합당한 사람을 상대로 합법적으로 대회를 소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만약 공무원들이 교회에 대한 공적인 적대행동을 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목사들은 스스로 가지는 직무에 따라 다른 적당한 사람과 같이 교회의 대표들로서 그와 같은 모임을 가질 것이다.

(수정 후)

1항 뒷 부분에 <그리고 그들의 직책과, 그리스도가 파괴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그들에게 준 권리로서 그러한 모임을 정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모이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될 때 그들을 소집하는 것은 특수교회의 감독자와 지배자에 속한다> 1788년에 첨가됨.


2항은 삭제됨.


3) 1886-1887년 수정판

(1) 24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수정 전(1647년판)

4항 하나님의 말씀에 금지되어 있는 혈족이나 친족끼리는 서로 결혼을 하지 못한다. 어떠한 인간의 법이나 단체의 허락으로도 인척이 되는 남녀 한 쌍이 같이 삶으로써 이루어지는 친족 간통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남자는 처형이나 처제와 결혼할 수 없다. 또한 여자는 남편의 형이나 동생과도 결혼할 수 없다.


결혼 항목에서는 친족 간에 결혼금지 조항이 삭제되었다. 이 항목은 1861년 남북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성도들의 가정문제에 직면하면서 수정한 부분이다. 즉 전쟁으로 남편이나 아내가 죽고 새롭게 가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적 문제로 친족 간에 재혼이나 결혼이 성행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A. A. 핫지는 그의 「웨스트민스터 신고백 해설」 “24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를 해설하면서, 근친성교 금지는 하나님의 말씀뿐 아니라 자연의 엄명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 율법의 기초는 항구적 관계요, 유대민족의 특수한 사회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임을 제시한다. 이 항목은 1826년, 1827년, 1843년, 1845년, 1847년에 수차례 미국장로교회에서 변경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다가 결국 1887년에 이르러 수정되었다.


4) 1903년 수정판

미국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수정과정은 1903년에 이르러 변질된 형태의 절정을 이루었다. 1903년판에서 핵심적으로 수정된 내용들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로 선언서를 첨부하여 3장 예정론, 10장 3조의 유아세례를 변경했고, 둘째로 문장 자체를 고친 부분은 16장7조 선행, 22장 3조 맹세, 25장6조 교황 부분이다. 셋째로 첨부한 장들은 34장 성령, 35장 선교 부분이다.

교리적 내용으로 살펴보면 전통적 개혁파 예정론을 예지(豫知)와 조건에 기초한 알미니안적인 예정론으로 변형한 것, 유아로 죽은 모든 자들을 선택에 포함시켜 예정론 개념을 약화 시킨 것과, 중생되지 않은 자들의 선행들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것, 교황은 적그리스도라는 부분을 삭제한 것, 그리스도의 속죄범위가 제한적이 않고 보편적이라는 것 등이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 수정의 내용을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적 수정이라고 비판하였다.

1901년 총회는 두 번째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신앙고백수정을 위촉하였으며 원본의 수정이나 또는 신앙선언서를 만드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903년에 포함된 선언문(10장 3에 대한 유권적 해석임)

교회 정치에 규정된 대로 교역자와 치리장로와 집사들의 안수시에 서약하는 서약은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다만 성서에서 가르치는 교리의 체계를 포함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 안에 있는 표현에서 얻은 어떤 추론에 대하여 교회가 부인할 뜻을 정식으로 표현하였으며, 계시된 진리의 어떤 부분이 현재에는 더 명백하게 표현하는 선언문이 필요하다고 교회가 정식으로 원하고 있으므로 미국 연합장로교회는 다음과 같이 유권적인 선언문을 발표한다.


이와 같은 수정을 제시하면서도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 있는 독특한 체계는 결코 손상시키지 않으며, 그 고백을 대신할 어떤 새로운 고백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고 기존 교리의 보다 나은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핑계를 댔다. 바빙크는 이 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각각의 경우에 주목할 것은 개정이 결정된 2년 후 1905년 5월에 이루어졌던 북장로교 일반대회에서, 1770년 각성운동으로부터 태어났고, 그들의 신앙고백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입장을 위하였던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교회연합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도 개혁주의교회와 신학은 진지한 위기에 들어선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과 무능력, 제한된 구속, 선택과 유기,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의들은 은밀히 부정되거나 역시 공공연히 거절되고 있다. 칼빈주의에 대한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1)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관하여

1647년 초판의 3장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결정(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라는 고백처럼 선택과 유기의 이중예정을 강조한다. 하지만 1903년 수정판은 유기 부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즉 유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강조하지 말고 모든 이들이 선택 받았다는 방식으로 이해를 촉구하였다.


첫째, 신앙고백서의 제 3장에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의 교리는 모든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과 조화되게, 전 세계의 죄에 대한 대상이 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선물과 조화되게, 그리고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의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한 그의 호의와 조화되게 주장되어야 한다. 멸망을 받는 사람들에 관한(유기자)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 교리는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의 죽음도 원하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충족하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게, 그리고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실 구원을 준비하신 것과 조화되게 주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제공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가 범한 죄 이외의 죄 값으로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선택과 유기의 구분을 파괴하고 오직 선택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행위를 약화시키는 알미니안적 형식이다. 이런 표현은 이미 도르트 신조에서 알미니안주의 자들이 “믿고자 하고 이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전체적이므로 이 선택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할 뿐, 그 외의 다른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라고 말하여 이중예정을 공격했던 말들이다. 결국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행위를 강조하는 예정예지, 무조건적 예정, 이중예정을 변형시켜 예지예정과 조건적 예정, 단일예정(선택만 강조)을 강조하였는데 1903년 수정판은 이런 인본주의적 예정론을 수용했던 것이다.


(2) 10장 실제적 부르심에 관하여

수정 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3항에서 “택함은 받은 영아는 어려서 죽는다 할지라도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을 받는다”라고 언급하여 제한적 선택을 강조하는 예정론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1638년 스코틀랜드 총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보편적 선택 입장인 아르미니우스주의, 혹을 일명 카메론주의와 박스터주의를 정죄 하였다. 벌콥도 그의 조직신학에서 개혁파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개혁파의 입장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리고 확실히,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구속 사역의 혜택을 실제로 베풀어 주신 사람들만을 구원하려는 목적에서 죽으셨다는 말과 동일하다. 개혁파임을 자처하는 여러 분파들 가운데 이러한 입장을 수정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오까다 교수도 신조 해설에서 영아의 죽음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소개하면서 선택받은 유아만이 구원받는 것이 전통적인 개혁신학 입장임을 강조하였다.


어린아이가 죽는데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유아가 죽으면 모두 구원받는다. 2. 세례받은 자는 모두 구원받는다. 3.복음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멸망받는다. 4.신자의 자녀는 구원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하간 택함을 받은 자만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절대주권적 자유에 기초하여 외적 소명을 절대적 조건을 보지 않는다.


이처럼 수정의 정신들 바탕에는 단지 시대의 변화에 대한 요구를 넘어선, 진리를 흐리게 하는 사단의 공격이 있음이 분명하다. 즉 개혁신앙의 독특성인 무조건적이며 제한적 선택과 유기를 강조하는 이중예정론은 수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부인되었다. 이런 부인은 다음의 1903년 선언문에서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둘째, 신앙고백의 제 10장 3절에 관련하여, 유아시절에 죽은 아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유아시절에 죽는 모든 아이는 구원의 선택에 포함되어 있으며,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해서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다고 우리는 믿는다. 성령은 자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 하실 것인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역사하신다.


결국 수정된 신앙고백서는 유아와 관련하여 원죄를 부정하고 자범죄만을 강조하여 모든 유아의 구원을 주장한 펠라기우스의 입장과 인간의 자유의지적 죄만을 강조한 알미니안주의 입장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결국 1903년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인간 중심적 사고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수정은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을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시는 이유는 오직 그분에 의해서만 인식되어지도록 놔두어야 한다’라고 경고한 칼빈의 신학적 입장을 크게 벗어난 것이다.


(3) 16장 선행에 관하여.

수정 전(1647년판) 신앙고백서는 고귀한 사람들의 선행일지라도 그것은 ‘죄’임을 분명히 하였다. 즉 16장 7조 선행에서 삭제된 부분은 “그것들은 죄악되며, … 그렇지만 그같은 행위들을 그들이 게을리 하게 되면 그것은 더욱 죄악되며, 하나님을 더욱 불쾌하게 하는 것이 된다”라는 마지막 문장이다. 초판은 불신자의 선행에 대하여 형식적으로 선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죄악됨을 강조하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주장하는 개혁파 신학을 잘 드러내었다. 그러나 수정 후에는 “죄악”이라는 부분을 삭제하고 단지 불신자의 선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칭찬받을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인간의 전적타락을 약화시키며 결국 부정하는 것이다. 1903년 수정판은 인간의 행위가 단지 구원을 얻는데 부족할 뿐이며, 자연인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방법과 목적만 제대로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변질시켰다.


(4) 22장 3조 맹세에 관하여.

고쳐진 것들 중 두 번째는 맹세에 대한 부분이다. 1903년 판은 1647년 판에서 “그와 동시에 합법적인 권세가 선하고 정당한 것에 대한 맹세를 요구하는 때에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죄가 된다.”라고 고백한 부분을 삭제했다.


(5) 25장 교회에 관하여

수정 전(1647년 판)에는 “교황은 적그리스도”로 명백하게 규정되었으며, 자신을 높이 올리며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수정 후의 신조는 교황은 단지 “비성경적인 일을 하는 것”이다로 표현을 완화시켰다. 그는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가 아니고, 단지 “비성경적이고 부당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명예롭지 못한 월권행위이다”라고 수정하여 로마 카톨릭에 대하여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6) 34장 성령에 관하여

1903년 수정판의 첨부한 장들 중 처음은 34장 “성령”에 관한 장으로 본문은 다음과 같다.

1. 성령은 삼위일체 신의 제 삼위로서 성부와 성자에서 나왔으나 동일한 실체를 가지시고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다. 이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세세토록 믿고 사랑하고 복종하고 예배드렸다.

2. 그는 주요, 생명의 부여자다. 어느 곳에든지 계시고 모든 선한 생각과 순결한 욕구와 사람 안에 있어서의 거룩한 고문이 되신다. 그에 의해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충동을 받았고 모든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무오하게 기록하도록 영감을 받았다. 복음의 경륜은 특히 그에게 위임 되었다. 그는 그 길을 준비하시고 그의 설득력으로서 동행하신다, 그리고 사람의 이성과 양심 위에 복음의 사신(使信)을 주어 그러한 자비로우신 은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구실이 없게 되고 성령을 거역하는 책임을 지게 된다.

3. 하나님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에게 언제든지 성령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 성령은 구속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단 하나의 효율적인 기관이다. 그는 사람을 그의 은혜로 중생케 하고, 그들의 죄를 시인케 하고, 참회하도록 마음을 움직이시고, 믿음 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는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키고 위로자와 성화자로서 그들 안에 남아 있어서 그들에게 입양의 영과 기도를 주신다. 또한 모든 은혜로운 일을 행하여 그것으로써 신자들이 구속의 날까지 성화되고 인치심을 받는다.

4. 성령이 내재함으로써 모든 신자는 먼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강하게 결합이 되며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 안에서 서로 연합이 된다. 그는 그의 교역자들을 부르고 그들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기름을 부어 주신다. 그리고 그들의 특수한 일을 위하여 교회 안에서의 모든 다른 직책을 위한 자격을 준다. 또한 그의 회원에게 여러 가지 은사와 은총을 부여해 준다. 성령은 교회가 드디어 지구를 덮을 때가지 교회를 보존하시고 늘어나게 하시며 순화시키시다가 종당에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거룩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이 항목을 보면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표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정의 배경에는 당시 오순절주의자들을 통해서 부흥운동이 전 교회적으로 급속도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미국의 2-3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이것은 1820년대 영국의 에드워드 어빙(1792-1834)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강조를 기점으로 해서 시작된 미국교회 내에서 성령의 능력적인 은사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던 때와 병행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 한다.

이 운동의 여파로 장로교인들 조차도 신비주의적 성령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신앙고백의 기준을 따라서는 성령운동을 소화해 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장로교회 안에도 성령운동이 급속도록 들어왔지만 신조의 내용은 이런 운동을 금지하는 교리적 내용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성령에 대한 교리를 통해서 이런 신비주의 운동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수정 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령”장을 따로 두지 않았지만 수정된 신조는 본 신조가 성령론이 약하다고 비판하면서 “성령”장을 첨부하였다. 개혁교회의 조직신학은 성령론을 구원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통이다. 이런 이해가 바빙크, 벌콥, 박형룡, 조석만의 조직신학에서 제시하는 전통적인 성령론의 구성이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조도 성령론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10-18장에 이르는 구원론 안에 넣었다. 그 결과 본 신조는 성령론이 전체 33장 중 1/3에 해당할 정도로 많아졌기 때문에 결코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백석대 유태화 교수나 일부 신학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성령론’ 보완해야”라고 지적하는 평가들은 잘못된 지적이다.

또한 성령의 구원사역을 설명할 때도 1647년 판은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라고 하여 예정론에 기초한 성령의 구원사역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1903년 판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에게 언제든지 성령을 주시기를 원하신다(3조)”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미니안적 예정론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리고 “그의 회원에게 여러 가지 은사와 은총을 부여해 준다. 성령은 교회가 드디어 지구를 덮을 때가지 교회를 보존하시고 늘어나게 하시며 순화시키시다가 종당에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거룩하도록 만드실 것이다.”(4조)라는 표현을 통해서는 당시 유행하던 신비주의적 성령운동에 기초한 은사론과 대형교회적 부흥론을 정당화 시켰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나 그 외의 신조들에서도 분명히 성령에 대한 이해가 잘 정립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교리의 내용 속에 성령의 자리와 역할이 구원론 형태로 분명히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정통 신조에 대한 전면 부정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성령을 삼위일체에서 분리하여 구원에 대한 독립적 사역을 강조하게 되면 어거스틴 이래 개혁신학에서 외쳤던 “외부를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은 분리되지 않는다”(opera trinitas da extra indivisa sunt)라는 삼위일체의 조화 균형이 파괴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수정에는 삼위의 사역 중 성령만을 강조하는 양태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사색의 길을 추구하려는 사상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수정으로 신비주의의 길은 장로교 안에서 급속도로 넓어져 가기 시작했다.


(7) 제 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


1.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완전한 사랑가운데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와 희생을 통하여 은혜의 언약을 마련하셨다. 그는 생명과 구원의 길이다. 사람의 모든 잃어버린 족속을 위해서는 충분하고 적합하다, 그리고 이 구원은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이 제공되었다.

2.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위한 그의 사랑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을 원하시는 그의 뜻이 선언되었으며, 구원의 유일의 방법이 충분하고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또한 참으로 참회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약속하시고 주어진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권하시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말씀에 따르는 그의 영에 의하여 그의 은혜로우신 초청을 받도록 사람에게 역설한다.

3.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주저 없이 그의 자비로우신 준비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의무요 특권이다. 반면에 참회도 하지 않고 불신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악화된 죄책을 초래하게 되며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망하게 된다.

4. 복음 안에서 제시된 것 이외에 구원의 길은 없으며, 신적 확립과 보통방법을 통해서 주어진 은혜 안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서 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에 위탁하기를 온 세상에 나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로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이미 질서가 확립되어 있는 기독교의 질서를 지지할 의무와 그들의 기도와 기부와 개개적인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왕국을 온 세상에 확장하는 데 공헌을 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본 내용도 34장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과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으로 신앙고백서에 추가 된 부분이다. 당시 오순절운동을 통해서 성령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면서 이런 부흥운동이 전 교회적으로 확산되면서 세계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부각되었다. 이런 흐름에서 “선교”에 대한 주제가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신비적 부흥운동과 선교가 얼마나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부흥운동에 영향을 입은 장로교회는 비(非)개혁교회들의 운동과 영향을 자연적으로 좇아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적 기준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교회 안에서도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본 내용을 새롭게 추가시켰다.

왜냐하면 기존의 신조가 예정론을 강조하고 있어서 선교에 대한 적극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교에 대한 교리적 정립을 새롭게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이 선교에 대한 추가 주장은 전통적 예정론에 대한 강한 거부감의 표현이었다. 이미 알미니안주의자들도 도르트 총회 때에 예정론이 선교와 성화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었다.


예정론과 여기에 첨가된 몇몇 요소들에 관한 개혁교회의 교리는 그 특징적인 경향에 비춰 볼 때 사람들에게서 모든 경건한 신자의 의무를 무시해 버리고 있으며, 이 세상적인 사단에 의해 조작된 일종의 마취제이다. 또한 이것은 사단의 견고한 요새이며, 여기에서 사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며 실망과 나태함의 화살로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며, 하나님을 죄와 불의의 원인으로 돌리며 또한 하나님을 폭군이요, 위선적인 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도르트 신조는 결론 부분에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비판을 배격하며 “대학이나 교회 안에서 이 교리를 조심스럽게 가르칠 것을 바라는 바이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나 설교를 함에 있어서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경건한 생활을 이루며 고난당한 영혼을 위로하도록 해야 하며”라고 권면했다. 즉 이들은 예정론을 잘 정립하면 그 속에 가장 열심 있는 선교와 성화의 내용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복음 자체는 전도, 즉 선교와 분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도를 생각하지 않고 복음의 내용을 정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기존의 신앙고백서는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 미흡하니 이제 새로운 교리를 정립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기존의 신앙고백적 기준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본문의 내용도 보면 이 표현을 통해서 기존의 개혁교회의 예정론과 제한 속죄에 대한 교리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와 희생을 통하여 … 잃어버린 모든 인류를 위해서 충분하고 적합하다, 그리고 이 구원은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이 제공되었다.”라는 표현은 도르트 총회에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보편속죄의 핵심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결국 1903년 수정판도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다”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알미니안적 “보편속죄와 보편구원론”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이 1903년 수정판은 개혁교회의 신조 역사 속에서 그토록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예정론, 제한 속죄, 전적부패,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라는 교리를 파괴하고 있다. 즉 과거에 분명히 위험한 교리로 정죄했던 내용을 수정과정을 통해서 점차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을 추가한 미국개혁교회나 한국장로교회는 점점 더 알미니안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교회로 변형되는 심각한 상태를 나타내고 말았다.

 

2. 대신과 백석교단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채택 현황


1) 대신교단

한국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채택 역사도 미국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아 둘로 나눠진다. 첫째는 1647년 초판을 존중하여 33장을 채택하는 정통 개혁교회 입장이다. 합동, 합신, 대신 교단은 초판을 헌법에 채택하였다. 둘째는 1903년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국장로교회의 변형된 35장을 채택하는 입장이다(통합, 기장, 백석).

1961년에 대신교단이 창설되면서 헌법은 합동측의 것으로 사용하다가 1968년 긴급수습총회에서 헌법문제가 거론되었으나 종전대로 수용하였다. 이때까지는 합동측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1970년 총회에서는 교단의 헌법을 완성키 위해 합동측 헌법을 수정하여 채택하였다. 이런 변화는 일본의 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오까다(岡田稔)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968년 귀국한 최순직의 영향 때문이다. 그는 대한신학교에서 교무처장과 전임강사로 조직신학을 강의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년 초판)를 강의하기 시작 하였다.

교단에서는 1970년 9월 3-4일의 5회 속회총회에서 헌법채택건의가 있었는데 총회의 헌법수정위원회 보고 가운데 교리신조부문에서 “합동측 헌법을 그대로 받기로 함. 단, 우리총회 입장은 역사적 개혁주의 노선을 지키기로 하다(신정통주의와 구별함)”라고 제시하여 대신교단의 신학이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 임을 확인하였다. 이후에 국제 기독교 협의회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 ICCC)의 탈퇴문제로 총회는 양분되고 1972년 총회에서 교단명칭을 대신(大神)으로 확정하였으며, 1974년 8월 19일 총회에서 최순직의 초안과 조석만의 교정을 통해 완성된 교회선언을 함으로써 대신교단의 신학을 천명하였다. 본교단의 노선 1항목에서 “우리는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제 신조 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삼는다”라고 하여 대신교단은 1647년 초판에 기초한 역사적 정통 개혁파 교단임을 확립했다.

최순직의 영향을 받은 김준삼도 고베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974년 귀국하여 1647년 초판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소요리문답을 대한신학교에서 강의하였다. ‘소요리문답’은 ‘신조학강해’라고 하여 1976년에 강의록이 나왔고 1978년에 1판, 1992년에 8판이 발행되기에 이르렀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977년에 ‘고백서강해’라 하여, 23장까지 소개했고, 이후 1981년 3판에 가서 33장 전체를 해설하였고, 1994년 5판에 이르기까지 20여년 강의가 지속되었다. 그의 해설집은 1647년 초판에 기초한 것이며, 1989년 박윤선의 해설집보다도 훨씬 앞서 있다. 또한 최초로 한국인 목사에 의한 웨스트민스터 해설집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그 뒤를 이어 조직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강의한 조석만은 오까다(岡田稔)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을 1977년에 번역하여 대신교단에 소개하였다. 이 작품은 1647년 초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집이 국내에 최초로 소개된 귀한 것이다. 또한 그는 교회선언 해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신(교단)의 교리적 신학적 사명에서 정통 개혁파 교단의 신조는 1647년 초판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며 기준문서가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이다. 본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성경 다음으로 신앙과 생활의 기준문서로 하는 칼빈주의 개혁파 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아가는 프로테스탄트 정통교회의 입장이다.”

이처럼 대신교단은 교단의 창립부터 지금까지 교단신학은 반드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공교회적 신학이어야만 하고 그 본문은 1647년 초판에 기초해야 함을 밝혔다.


2) 백석교단

백석교단은 1903년 수정판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교단헌법으로 채택하였다. 백석교단은 제3부 신앙고백서 항목에서 “34장(성령)과 35장(선교)은 1903년 당시 미국북장로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첨가하여 사용하게 되었고 미국남장로회는 이것을 1842년에 정식으로 받아들여 현재까지 사용 중에 있다.”라고 고백하여 1903년 변형된 신조를 채택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 고백 외에도 부록에서는 “이 선언문은 1903년에 채택된 것이다.”라고 하여 변형된 선언문을 재차 강조한다. 이 선언문의 신학적 문제는 1903년 미국장로교회가 정통 개혁교회의 예정론과 신적작정론을 버리고 알미니안주의와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적으로 수정한 부분이다. 이 외에도 1903년 판은 25장 교회 부분에서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다”라는 부분을 삭제하여 로마 가톨릭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약화시켰으며, 또한 알미니안주의의 보편구원론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2가지 항목을 추가 시켰다.

“첫째, 신앙고백서의 제3장에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칙령(勅令)에 관한 교리는 전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의 교리와 조화되는 것으로 이해하며”, “둘째, 신앙고백의 제10장 3절에 관련하여, -- 유아시절에 죽은 모든 아이는 구원에 선택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백석교단은 “1967년도의 미국판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성구가 인용되어 있지 않으나 이 번역은 독자의 편의를 돕기 위하여 1647년도 판에서 성구를 인용했음을 밝힌다.”라고 하여 1967년 신조를 토대로 번역하였다. 1967년은 미국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버리고 “새 신앙고백서”를 채택하던 시기이다. 이 신조는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바르멘 선언을 기초하여 만들어 졌으며 예장(기장)이 적극적으로 수용할 정도로 자유주의화 된 신조이다. 바로 이 시기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토대로 번역한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와 같이 백석교단의 신조는 정통 개혁교회가 지켜온 1647년 초판의 입장을 버리고 통합측, 기장측 등이 채택한 변형된 1903년 판 신조에 기초하고 있다.


결론


영미권을 중심으로 개혁교회의 핵심구성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어떻게 채택하는가에 따라 평가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 신조의 다양한 수정판 때문에 채택뿐만 아니라 어떤 본문을 사용하는지도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등장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역사적 정통 개혁파 교회는 1647년 초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자신들의 개혁신앙을 표현했기 때문에 오늘날 개혁파 신앙을 계승하고자 할 때는 이 원리를 잘 지켜야 한다. 우리가 진정 개혁해야 할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신앙고백서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인본주의적 수정정신들이다. 즉 이 신조의 채택과정 중에 있었던 많은 수정작업들이 오히려 종교개혁의 맥을 끊는 오류 가운데 있었음을 항상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