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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고백하는 행위의 중요성

성경: 마16:18절

요즘에는 과학 기술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발달하는지 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과학 기술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뿐 아니라 대중도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과학 시술의 급속한 발달로 말미암아 사회가 전반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대한 전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교양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요즈음에는 컴퓨터를 모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역사가 거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역사적 신앙고백’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공부하는 것은 고집불통의 보수적인 사람들의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교회를 연합시키나 신앙고백은 교회를 분열 시킨다’는 식의 말이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떠한 생각까지 하게 되느냐 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사랑이고, 신앙고백과 신조는 머리만 크게 만들고 가슴을 차갑게 만들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멀리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은 대체로 신앙고백을 소극적으로 평가합니다.

이에 반하여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어떤 기독교인은 신앙고백을 ‘고백하는 행위’로 이해하여서 적극적으로 강조합니다. 신앙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것을 온 몸으로 고백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고백을 머리와 관련지은 사람은 신앙고백을 이미 쓰인 것, 곧 신앙고백서로 이해하는 반면에, 행위와 관련지은 사람은 온몸으로 쓰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의 행위’‘신앙고백의 내용’은 양자택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의 행위는 반드시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정리되며, 그 내용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도 동일한 고백의 행위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와 관련해서 생각하고, 고백하는 행위에서부터 정리되는 ‘신앙고백의 내용’과 그 내용을 받은 사람이 동일한 고백의 행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다루겠습니다.

 

1. 신앙고백에 대한 성경의 용례들

신앙고백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로기아’(ὸμολοΥία)인데 어원적으로 ‘함께’(ὸμο)와 ‘말’(λοΥία)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동사형 ‘호모로게오’(ὸμολοΥέω)는 특히 법정에서 두 사람이 ‘동일한 것에 대해서 함께 말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동의하다,’ ‘공언하다,’ ‘드러내고 말하다,’ ‘서약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뜻으로 사용된 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개적으로 ‘확언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예로는 마7:23과 마10:32 그리고 행23:8과 행24:14 또한 딛1:16과 히11:13 등을 들 수 있고, 언약의 관계에서 ‘공언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예로는 마14:7과 눅22:6 그리고 히7:17과 히10:23 등을 들 수 있으며, 법정에서 ‘증언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예로는 딤전6:13을 들 수 있습니다.

‘호모로게오’라는 말은 성경에서 ‘함께 말하다’는 뜻 이외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다’(히13:15),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다’(요일1:9) 등의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호모로게오’ ‘찬양’‘자백’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실상적인 용례와 상당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을 동일한 말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찬송’이고, 말씀의 기준을 따라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호모로게오’가 이러한 뜻으로 발전한 것은 예배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고백함

신앙고백이 어원적으로 ‘함께 말하다’는 뜻을 지니는데, ‘누구와’ 함께 말하는 것인가? 물론 나의 양심과 함께 말하고 다른 교인들과 함께 말하는 것도 포함하겠지만,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1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시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과 함께 말하는 것’이 신앙고백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신앙고백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하나님을 향해 복창’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은 ‘호모로게오’라는 단어의 어원을 놓고 생각한 것인데 신약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을 가지고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베드로 사도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전범적인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마16:16/cf.막8:29/눅9:20).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시면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혈육’으로 지칭되는 연약한 사람으로서는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cf.요6:63/고전2:14).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교훈도 배우고 이적도 보았지만, 이것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 혈육으로 알려 주신 것이 아니었고, 단지 사람일뿐인 베드로가 다른 사람보다 명민해서 스스로 깨우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교훈과 이적을 사용해서 베드로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마음이 겸손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깨우치셨습니다(마11:25-26).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마음이 높은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못했고, 겸손한 제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워서 바른 고백을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복창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베드로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고백한 것이 나옵니다(요6:69).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고백한 것이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내용적으로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그분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가르치셨으나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고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떠났습니다(요6:60-62). 그 때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누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8-69).

요한복음에서도 베드로가 하나님께로부터 배워서 바른 고백을 한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갈 때 주님은 [이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65).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예수님께로 이끌지 않으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요6:44-45).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사실을 가르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사람이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고백했습니다.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요14:24)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배울 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는 들었지만 거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않은 사람은 이러한 신앙을 고백할 수 없었고 결국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합니다(요6:63). 육신만으로는 비록 그것이 인자의 육신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 즉 세상에 생명을 주는 목적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단지 육신일 뿐인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이 진리를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오직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사람만이 하나님을 향해서 바르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신앙고백은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통해서 배운 말씀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우리가 하는 것이지만 그 내용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시의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우고, 배운 대로 하나님을 향해 복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2) 찬송

‘찬송하다’는 뜻은 히브리어 ‘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