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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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시22:25)

오늘은 찬송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찬송은 교회 안에서 항상 불려지고 있음에도 정작 찬송의 바른 의미와 찬송을 부르는 바른 자세나 태도에 대해서는 제대로 소개되고 있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그 결과 성경적인 찬송의 모습이 아닌 인본주의적인 찬송의 모습들이 교회 가운데 난무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찬송하면 되지 않는가, 찬송을 안 하는 것이 문제지 찬송을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서 배웠던 예배와 기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성경적인 예배와 기도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전혀 받지 않으시는 것과 같이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5:22-23),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암8:10)라는 말씀을 보게되면 예배는 물론이며, 찬송도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듣지 않으시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비(非)성경적인 찬송은 “애곡”으로 바꾸어 버리시겠다고 경고하고 계신 것을 보게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무서운 경고를 받고 있었던 이유는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암6:5) 라는 말씀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이들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성경적인 찬송의 정신과 자세를 갖춘 것이 아니라 “헛된 노래”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헛된 노래라고 책망한 이유는 믿음의 선조인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적인 찬송의 정신과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형식적으로 자신들도 다윗처럼 노래하고 있다고 핑계하면서 자신들 마음대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고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찬송의 모습과 내용을 살펴보면, 형식적으로는 구약이나 신약의 모습을 좇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정작 그 속은 대부분 인본주의적인 노래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CCM 활동을 통해서 일반 대중가요식의 찬송과 또는 청소년들의 록음악, 레게, 힙합 등의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그 피해는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바른 찬송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은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송을 찾고 회복하여 바로 그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특히 개혁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공적으로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회중에서 함께, 또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시편을 찬송할 것이다”(시편찬송에 대하여)라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고백처럼 “시편찬송”을 성경적인 찬송가로 고백하며 간직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편찬송을 교회 안에서 부르는 교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역사적인 개혁교회에서 늘 성경적인 찬송으로 고백하며 간직해 왔던 시편찬송이 전혀 소개되지 않고 오히려 통합찬송가나 복음송가가 교회찬송의 대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때 성경적인 찬송으로 시편찬송의 의미와 내용을 철저하게 회복해야 할 거룩한 소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이런 작업을 위해서 먼저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찬송의 의미를 정리하고 또한 교회역사 속에서 시편찬송가가 어떻게 고백되고 또한 간직되어져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A. 성경의 증거

1. 구약의 증거.

우선 성경에서 노래를 사용했던 이유와 목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찬송이 우리의 신앙과 공적예배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1)라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통해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자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큰 역사를 찬양하기 위해서 노래하는 것은 신명기에 와서 그 이유와 목적이 더욱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신31:19-22),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게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신31:30)


위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노래란 단지 인간의 감정과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조수단으로 사용하셨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의 내용을 기억하므로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좇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셨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는 자신들의 주관적인 체험이 신앙에 의해서 표현된 노래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하는 노래였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사용되어지고 있는 통합찬송가의 위험성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통합찬송가는 일반 성도들이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 체험과 감정의 변화에 따라서 그때그때 만든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내용이 성경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찬송의 내용이 매우 낯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통일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찬송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 개인의 주관적인 신앙의 경험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철저하게 말씀의 내용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정신은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시119:54),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시119:172),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말씀)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시138:5)라는 말씀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간직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 노래를 명령하셨던 내용은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역사 가운에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삿5:1),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삿5:11)라는 사사기의 말씀도 증거되어지고 있으며, 더욱 분명한 내용은 다윗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삼하22:1)라는 말씀과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하매”(대상15:16) 라는 말씀에 잘 증거되고 있습니다. 특히 다윗 시대에 와서는 노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성전예배”의 형식으로 정리가 되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상25:1-2)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대상25:5-7) 이는 다 헤만의 아들들이니 나팔을 부는 자며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라 하나님이 헤만에게 열 네 아들과 세 딸을 주셨더라.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여 섬겼으며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 저희와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 팔십 팔인이라


이처럼 찬송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엄중한 규칙으로 소개되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왕이 레위 사람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의 명한 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하셨음이라”(대하29:25)라는 말씀처럼 인간이 자신의 마음대로 선택하고 또는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규칙으로 주신 것이기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지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부터 시편찬송이 정식으로 성전예배에 사용돼 왔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모세의 노래나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한나의 노래, 여호수아의 노래처럼 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찬송이 전달되었으나 다윗과 아삽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시편을 완성케 해 주시고, 이 시편을 운율적으로 만들어 주셔서 찬송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취하도록 해주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이와 같은 찬송의 역사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시편이 집대성되는 것과, 그 결과 기존에 사용하던 다른 노래는 점차 사라지고 시편찬송만이 성전예배 때의 찬송으로 정착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다윗 이후의 역사를 보면 이와 같은 시편찬송이 예배의 찬송으로 정착되어지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대하23:18)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의 직원을 세워 제사장 레위 사람의 수하에 맡기니 이들은 다윗이 전에 그 반차를 나누어서 여호와의 전에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자기의 정한 규례대로 즐거이 부르고 노래하게 하였던 자더라

(대하29:25-29) 왕이 레위 사람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의 명한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하셨음이라, 레위 사람은 다윗의 악기를 잡고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서매, 히스기야가 명하여 번제를 단에 드릴 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 함께 있는 자가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 히스기야왕이 귀인들로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니라


위의 말씀 중에서 히스기야왕의 종교개혁을 살펴보면 성전예배를 회복하면서 찬송의 직무를 다시 정립해 가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처럼 찬송의 직무를 맡은 자뿐만 아니라 이들이 불러야 했던 찬송의 내용도 분명하게 언급해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그것은 “여호와의 시(時)”,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時)”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편”을 언급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찬송의 직무자와 그리고 그들이 불러야 했던 내용은 히스기야 왕이 마음대로 정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는 여호와께서 그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하셨음이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은 것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되었던 찬송의 직무가 바벨론의 포로생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2:41)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일백 이십 팔명이요

(느7:1)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느12:27)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느12:36) 그 형제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2. 신약의 증거

우리는 구약의 증거를 통해서 찬송의 특별한 의미와 성격을 살펴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도록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찬송의 내용이 바로 시편찬송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찬송의 역사가 신약에서는 어떻게 증거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150편의 시편을 찬송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시편찬송은 예배를 위해 신적으로 영감된 찬송가이며 시대를 불문하는 찬양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주의 성찬식을 제정하신 후, 감람산으로 가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찬송(hymn; a praise)을 부르신 장면을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26:30)(막14:26)라는 말씀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제자들과 함께 부르신 찬송은 유대인의 유월절기에 전통적으로 부르던 시편찬송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6:25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미”(휨노스)한 것이나, 야고보서 5:13에서 “찬송할지니라”(팔레토)라는 단어도 모두 시편을 뜻하는 용어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첫번째 편지에서,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라는 말씀을 제시하면서 사도는 교회의 분열과 혼란을 책망하면서 공적 예배의 한 요소로서 시편 찬송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또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라는 말씀에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위의 두 말씀은 오늘날 “경배와 찬양”이라는 제목으로 청소년들을 통해서 급속히 퍼지고 있는 복음송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구절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의 의미를 잘 살펴야 합니다. 특히 선교단체들의 찬양활동을 통하여 “신령한 노래”라는 의미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소위 “방언찬양”이라는 것까지도 성경적인 찬송으로 오해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위의 말씀을 조심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위의 3가지 표현은 찬송하는 방법과 자세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모두 시편찬송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혁교회에서는 인정되고 있습니다. 특히 칼빈은 강요에서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이것은 시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와 찬미”라는 단어는 이미 예수님과 바울의(고전14:26) 증거를 통해서 시편을 표현하는 방식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시(詩)”(프살로스)라는 말은 시편을 뜻하는 것이고, “찬미”(휨노스)라는 것은 70인역 헬라어 성경을 보면 시편의 용어와 표제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노래”(호데)라고 하는 것도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대상25:2)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다윗이 명하여 세운 노래의 형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 80번 정도 나오는데 45번 정도가 시편에 사용되어집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말씀’, ‘율법’, ‘도(道)’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처럼 같은 의미를 표현형식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제시되는 용어들도 모두 시편을 가리키고 있는 내용들인 것입니다. 결국 “신령한 노래”라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서 세웠던 “시편찬송”인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해석을 할 때는 성경 그 자체에서 쓰여지고 있는 배경과 의미를 가지고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날 생각하는 대로 “신령한 노래”의 의미를 이해하면 안됩니다.


B. 교회역사를 통한 증거

1. 초대교회의 시편찬송

초대교회부터 시편은 공적인 예배에 있어서 기도와 찬송의 안내서로서 또는 개인이 하나님과 교제할 때의 신앙의 유산으로 쓰여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신자의 예배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찬송가가 예배에 쓰여지게 된 것은 4세기 이후부터입니다. 초대 교회와 관련해서, 부쉘(Bushell)은 “교회 예배 안으로 비영감적인 찬송이 나타난 것은 점차적인 과정 속에서의 일이었으며, 4세기가 돼서야 비로소 널리 퍼지게 되었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윌리암슨(G. I. Williamson/소요리문답 저자)은 한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가치있는 사실은 비(非)성경적인 찬송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그러한 현상은 오히려 정통 교회내에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단 집단에서 나타난 것이다. 만약 초기부터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그러한 찬송을 만들고 이용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았다면,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현상들은 처음 사도들로부터 받았던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이처럼 최초의 3-4세기에는, 이단들은 찬송가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한 반면, 정통교회는 시편찬송을 가장 중요하게 불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지주의의 말시온이 그 사상을 전하기 위하여 찬송가를 작곡하였던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교회회의는 반복해서 시편찬송의 찬송으로서의 충분성을 확인하고 찬송가의 도입을 철저하게 부정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증거는 325년 라오디게아 회의에서 성경적이지 않은 노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한 것이나, 587년 니케아 회의나 653년 톨레도 회의에서 시편을 완전히 자기의 것을 삼지 않는 사람은 감독이 될 수 없도록 결의한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증거들 외에도 더욱 분명한 증거는 어거스틴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시편찬송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유혹은 끊임없이 나를 억제하며 구속했으나 주님께서 나를 풀어 자유롭게 하여 주셨습니다. -- 그러나 이따금 나는 의미보다도 멜로디를 더 좋아한 적도 있었습니다. 멜로디가 불안하고 박자와 음정이 맞지 않으면 거기에 신경이 쓰여 좋은 내용과 의미에 무관심해지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는 나의 영이 청각의 쾌락에 의하여 속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육체적 감각에 너무 치우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모든 육체적 감각은(멜로디) 먼저 이성에(가사) 의하여 통제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따금 육체적 쾌락은 이성에 순종하며 뛰따르기보다는 오히려 이성을 억제하며 앞서 나가기도 합니다. 결국 나는 죄를 짓는 것이고 죄를 짓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육체적 감각보다는 이성을 중요시한 나머지 축제 때 시편을 노래하던 모든 즐거운 멜로디도 외면한 채 오직 주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는 마치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노래하는 모든 봉독송에서 될 수 있는 한 모든 멜로디를 없앤 채 무게 있는 음성으로 읽어 나가는 것을 원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찬양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렸던 일을 기억합니다. 비록 나를 감동시킨 것이 노래 가락이 아니라 가사였다고 할지라도,청아한 음성으로 아름다운 멜로디에 붙여 노래했던 것이었으므로, 그러한 전통적인 찬양도 큰 복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됩니다.


구원의 기쁨이 가장 중요하며 육체적 감각의 쾌락은 위험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룩한 교회에서 부른 찬양이 아름다운 것이며 좋은 것이라는 데에는 더 이상 이론을 제기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의 찬양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굳건하게 붙들어 줍니다. 물론 가사보다도 멜로디가 더욱 나를 감동시켰다면 그것은 나의 벌받을 죄라고 할 수 있으며, 차라리 노래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교부시대 당시에도 정통교회에서는 항상 시편을 운율적으로 찬송하는 것이 교회예배의 전통이었으며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가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정신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멜로디가 가사를 방해하지 않고 가사를 잘 전달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되도록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는 시편찬송을 찬송의 중요한 규칙으로 사용했지만 이 외에도 마리아의 찬가나 사가랴의 찬가, 사도신경송, 주기도문송, 십계명송 등도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비영감적인 찬송이 아니라 시편과 신약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한 것들이며, 또한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이기 때문에 시편에서 담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그대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시편찬송가를 버리고 일반성도들이 만든 찬송가를 소유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만약 시편찬송이 불충분하다면 왜 예배를 위한 새로운 노래들을 만들도록 하는 계명이 없는가? 


둘째로, 만약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면 왜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 하에서 새로운 노래들을 작사(作詞)하지 않았을까? 


셋째로, 어째서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교회 문서들 가운데서 비영감적인 찬송의 어떤 부분들도 발견되어지지 않는가? 게다가 정통 교회에서는 비영감적 찬송들을 작사하기 전까지 그러한 찬송을 예배 시 이용했다는 한마디의 언급도 찾아볼 수가 없으며 2세기 후기가 되기까지 그러한 찬송 사용에 대한 일체의 흔적도 없었던 것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넷째로, 5세기에 접어들면서 왜 비영감적인 찬송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대가 있었는가? 즉 위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라오디게아(Laodicea) 종교회의(A.D. 381)와 칼케돈(Chalcedon) 회의(A.D. 451), 니케아 회의, 톨레도 회의 등은 왜 비영감적인 찬송의 등장에 대해 반대하였는가? 뿐만 아니라 부쉘은 “9세기 말엽에 우리는 순수한 시편 찬송의 지지를 보낸 초기 교회 회의에 대한 호소(매력)들을 발견한다”고 증거해 주기도 합니다.


2. 종교개혁 시대의 시편찬송

중세시대 동안에는 시편찬송들을 조금씩 거부하는 움직임이 교회 안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즉 “예배를 위한 집회에서 찬송을 부를 때에도 공중기도 때나 마찬가지로 절제가 필요하다. 로마 카톨릭이 사용하는 그레고리안 찬트에는 여러 가지 어리석은 것들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개신교들이 이것을 거절하는데, 이것은 옳은 일이다”(23장)라는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 내용을 살펴보면 그레고리안 찬트가 정착되면서 점차적으로 시편찬송의 자리가 소멸되어져 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혼란의 시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으며, 교회의 개혁은 예배의 개혁과 함께 시편찬송을 다시 회복하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개혁교회의 성도가 된다는 것은 시편찬송을 부르는 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2세기 내지 2세기 반 동안 일반적으로 시편찬송 이외에는 어떤 찬송도 예배에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사도신경송, 주기도문송, 십계명송은 허용). 이처럼 시편찬송이 개혁교회의 예배내용으로 중요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칼빈의 제네바 교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교회를 성경적인 모습으로 개혁해 나가기 위해서 1537년 의회에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제의서’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제안했습니다.


공적예배의 형식으로 시편들을 노래함은 교회의 건덕상 대단히 유익하니,----- 하나님께 찬송을 노래하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일깨워서 일치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할 것이다. ----- 한편 우리가 교회에서 노래하기를 원하는 시편들이 있다. 이것은 고대 교회나 바울 자신의 증거로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바와 같다. ----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고양시키며 열심을 북돋우며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으로서 부르며 높이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더욱이 이같이 시편을 노래함으로서 교황과 그에게 속하였던 자들이 교회로부터 빼앗아 버렸던 유익과 위로를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개혁의 내용으로 제시된 “시편찬송”의 회복은 “성만찬”과 “교리문답교육”과 함께 당시에 교회개혁의 주된 내용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었기에 칼빈은 제네바 의회로부터 추방되었다가 다시 초청을 받았을 때 수락조건으로 위의 내용들을 다시 제시했으며, 이것을 허락해 주는 조건으로 제네바 교회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외에도 시편찬송에 대한 중요성은 칼빈의 목회사역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제네바를 중심으로 가정, 학교, 교회교육 속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안건에도 시편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는 학교 교육의 과정으로 토요일 오후 3시에 학교 수업에서 반드시 전 주일에 배운 것을 복습시켰으며, 이러한 교리교육과 함께 예배와 함께 찬송 부르기(시편), 그리고 성찬도 자주 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찬송에 대한 증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도 다음과 같이 중요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겸해서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를 논한다면, 이 관습은 심히 오랜 것일 뿐 아니라, 사도시대에도 있었다. 이것은 바울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다. 즉 고전14:15, 골3:16에서 바울은 음성과 심령으로 노래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다음으로는 신자들이 서로 덕을 세울 수 있는 신령한 노래를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밀라노 교회는 암브로시우스 때에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관습이 세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때에 밀라노 교회는 발렌티니아누스의 모친 유스티나가 정통 신앙에 맹렬히 반대해서,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욱 끊임없이 기도에 전심할 때였다.


이 관습은 동방교회에서 왔다고 어거스틴은 말해 주고 있다. 동방교회는 성체를 들기 전 또는 성체를 사람들에게 나눠 줄 때에, 성찬대 앞에서 시편에 있는 성가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합하다하고 엄숙한 태도와 조화를 이룬 노래를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행동에 확실히 위엄과 운치를 더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하겠다는 진정한 열성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사의영적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거스틴도 이 위험성을 많이 염려해서 어떤 때는 아타나시우스가 지킨 관례가 확립되기를 원했노라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음성에 억양을 적게 붙여서 노래를 한다기보다는 말하는 것 같이 들리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노래에서 받은 유익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어거스틴은 반대 방향(곡조를 넣는 것)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므로 이렇게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강요3.20.32)


위의 칼빈의 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칼빈도 노래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가사가 바르게 전달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 가사를 더욱 깊이 전달받을 수 있도록 운율과 멜로디를 사용하는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찬송의 성격과 함께 언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멜로디를 연주하는 악기사용에 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멜로디를 사용하다보면 자연적으로 악기의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칼빈은 악기 사용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율법 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레위족속들이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연약하고 어린아이와 같았으므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그러한 기본원리에 의해 백성들을 훈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복음의 분명한 빛이 율법의 그림자들을 물리치시고, 하나님은 모두 단순한 형태로 예배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으며,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명한 것들을 모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며 실수하는 것임을 또한 가르치셨다. 이로부터, 로마카톨릭은 이러한 것들을 자신들 것으로 바꾸는 원숭이였음을 보여준 것이 명백하다(시81:3주석)


제금을 연주한 것과, 수금과 열 줄 비파를 타는 것, 시편에 자주 언급되는 많은 종류의 음악들은 교육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율법의 어린이적인 가르침이었다. 방금 나는 명령되어진 성전 예배를 말하고 있었다. 지금, 만약 신자들이 자신들을 즐겁게 하려고 악기를 선택한다면, 내 생각으로는,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부터 자신들의 즐거움을 분리하지 않음을 거절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주 자신들의 거룩한 모임을 가질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되는 악기들은 향을 태우는 것과 등불을 밝히는 것과 율법의 다른 그림자들을 회복하는 것보다도 더 부적절한 것이 된다. 그래서 로마카톨릭주의자는 다른 많은 것들 뿐 아니라, 바로 이것을 유대인들로부터 어리석게 채용한 것이다. 외적인 허례를 좋아하는 자들은 그 소란함 가운데 즐거워한다. 그러나 사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권하신 단순성은 그분을 더욱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다(시33:2주석)


이런 것들은 다만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아직 연약하고 유치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뿐이다. 이 점에 있어서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과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간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교회가 완성된 단계에 도달한 지금 분리된 시대의 그림자를 도입하는 것은 복음의 빛을 매장시키는 결과에 불과하다. 이렇게 볼 때 내가 다른 곳에서도 말하겠지만 교황주의자들이 악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용하던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림자에 불과했고 복음과 더불어 종식을 고한 구약 시대의 예배에 나타난 하찮은 유희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애매모호한 방법으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시92:4주석)


칼빈 이외에 고대 교부들을 살펴보면 크리소스톰과 제롬의 표현을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노래하는 까닭에 악기나 훈련된 목소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경건한 마음과 지혜, 건전한 이성, 깨끗한 양심이 필요하다. 이해하며 찬송하는 사람은 성령의 은혜를 기원하는 자이다(크리소스톰)


사람이 노래하는 곡을 올바르게 부르지 못한다 해도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관계치 않지만 신의 전당을 음악으로 소란하게 극장화하지 말라(제롬)


위 글에서 칼빈은 구약에 있어서 악기 사용이 성전예배를 위한 의식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신약에 와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네바 교회에서는 시편을 무반주의 형태로 운율에 맞추어 찬송하는 형태를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칼빈의 입장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즉 칼빈이 악기를 폐지한 것은 그 시대에 로마카톨릭이 너무 무분별하게 남용했기 때문에 폐지한 것이지 성경적인 폐지의 명령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박윤선 목사). 물론 후대 개혁교회 안에서 이처럼 이해해서 교회 안에 피아노를 다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케빈 리드(Kevin Reed) 교수는 칼빈의 주석에서 볼 수 있는 입장을 다시 한번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는 첫째로, 성막과 성전 악사들의 지정은 성경적 예배 형태의 일부로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으며, 둘째로 하나님과 그 백성들간의 만나는 장소인 언약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한 악사들은 모두 레위 지파들이었다는 것이며, 셋째로 레위 악사들에 의해 사용된 악기들은 모두 신적인 영감으로 지시되어진 것들이었음을 주장하면서 악기폐지는 의식법의 폐지로 교회 안에 금지된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이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신약을 살펴볼 때, 구약의 연속성뿐 아니라 불연속성적인 요소들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구약의 공적예배에서 악기를 다룬 이들이 장막과 성전에서 섬긴 레위인들었음이 주목할만하다. 레위의 제사장적 직임은 신약에 의해서 대치되었다. 그래서 악기 사용의 지지자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하는 어려움이 있게 된다. 만약 그들이 신약의 예배 안으로 악기를 들여오려고 한다면 장막과 성전 규례와 상관이 없는 악기 사용의 성경적 근거를 반드시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면, 그러한 의식(儀式)적 준수를 공적 예배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부적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악기 사용의 지지자들이 공적 예배 안에서 자신들의 악기 사용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