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 '성자에게서도' 나온다는 표현을 일명 '필리오케'(filioque) 교리라고 한다.

'필리오케'라는 말은 영어로 'and from the Son'(그리고 아들로부터도)라는 뜻이다.

이 표현 하나로 인해서 중세 시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나누어지게 된다.

즉 7-11세기에 걸쳐 서방교회는 니케아 신조에 성령께 대한 고백의 애매한 부분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좀 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필리오케'를 삽입함으로써 동방교회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서방교회와 작별을 하게 된 것이다.

서방교회가 분열을 감수하면서도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케'를 반드시 첨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유는 이 고백의 유무(有無)가 사소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본질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고백이 어찌하여 기독교 본질을 좌우하는 문제라는 것인가?

필자는 이 문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필리오케'에 대한 동방교회의 주장을 살펴보자.

동방 교회는 니케아 신조에서 성령은 성자로부터 나오지 않고 성부로부터만 나온다고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합리주의적 관점을 견지한 것으로서 어떻게 한 인격(성령)이 두 인격(성부와 성자)으로부터 발현(출)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성부와 성자가 아무리 하나이고 동등하다고 여겨지더라도, 그 통일성과 동등성이 항상 성부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바빙크, '개혁주의 신론'(기독교문서선교회,1994), p. 463].

이런 그들의 주장은 우리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타당성과 합리성을 충분히 내포한 주장이다.


그러나 신학의 접근 방식은 인간적인 논리적 합리성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논리적 합리성을 따라가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논리적 합리성이라는 것은 주로 경험과 지적 이해력의 한계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오류로 가는 경향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동방교회의 주장은 인간적 합리성을 추구했다면, 서방교회는 성경적 합리성을 추구했다고 본다.


즉 서방 교회는 인간적 합리성을 통해서 본다면 동방교회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지만, 그들의 논리적 타당성을 따라가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의 일체성(삼위일체)성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성부로부터만 발현되고(나오시고) 성자는 단순히 성령을 보내시는 분에 불과하다면 성자는 성부께 종속된 열등한 하나님으로 여겨진다는 논리적 귀결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성삼위 하나님의 신비를 합리성으로 인식하려고 하는 시도들은 항상 이단으로 정죄되곤 했다는 점을 우리는 교부시대 이단들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과거 교리 논쟁을 보면서 이런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를 가지고 다투고 분열되는 모습이 한심하게 보이곤 한다.

왜 교회는 서로 존중해주거나 관대하지 않고 언제나 이런 식의 사색적인 논쟁으로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쓸데 없는 소모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겐 한심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태도는 한심하고 소심한 태도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적 사색에 심취한 사람들의 논쟁하기 좋아하는 소모적인 태도도 아니다.

이들의 이런 태도는 사소한 것을 통해서도 엄청난 오류를 내다 볼 줄 아는 신중함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태도를 통해서 오늘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데 얼마나 신중하지 못한지 반성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이 문제를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내다 보았다는 것인가?

서방교회의 학자들은 이 문제가 궁극적으로 삼위일체론을 파괴하며, 더 나아가 교회의 정체성을 뒤 흔들 것이며, 성도들의 경건에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즉 동방교회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첫 번째로 성자는 성부께 종속된 존재라는 인식이 생긴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계시의 두 방편을 인정하게 되면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교리가 파괴되고 말 것이며, 세 번째는 신비주의와 교조주의가 교회를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좁은 지면에 일일이 다 다룰 수 없으므로 이 문제를 종합해서 말씀드린다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만일 동방교회의 주장처럼 '필리오케'의 교리를 부정하게 된다면 성부에 대한 계시는 성자만을 통해서만 일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만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필요한 계시는 성자(오직 성경)를 통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독립된 사역(신비적 체험이나 직통계시)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성부께로 인도하는(구원을 위한) 계시가 두 가지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바빙크의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면 필리오케를 부정하게 되면 나타나는 것은 "교리는 정신만을 위한 것이고, 신학적인 사변에만 적절한 대사이 된다. 그리고 그와 떨어져서 그 옆에 또 다른 생명의 원천이 있으니, 이른바 성신 신비주의(the mysticism of the Spirit)이다."(Ibid.)

이렇게 성자와 성령을 분리해서 이해하게 되면 성령은 더 이상 성자의 가르침만을 증거하는 영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부정되어야 하는 말씀이 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그러므로 필리오케를 부정하게 될 경우 교회에서는 성경을 무시하는 풍조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비주의와 직통계시가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성경 없이 성령의 인도만을 통한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흐름이 바로 WCC운동(종교 통합운동)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WCC운동은 '성령 운동'을 중심으로 종교 통합을 주도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WCC운동의 눈으로 볼 때 '필리오케'는 눈의 가시와 같은 교리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필리오케의 교리는 WCC운동이 비 성경적인 운동이며, 배교적 운동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WCC운동운 니케아 신조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필리오케'를 삭제하기 위한 시도를 함을써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신학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의지가 1982년에 페루의 리마에서 모인 WCC 산하 기관인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야말로 세계기독교회 일치를 이루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신조임을 선언하고,다른 모든 기독교회들도 이 신조를 공식 인정하도록 촉구하면서 이 신조로부터 '필리오케'를 삭제하는데 합의를 보았다(남정우,개혁교회와 동방정교회 에큐메니칼 대화에 관한고찰(서울: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미간행 석사논문(교회사부분),1995).데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께 대한 끔찍한 반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이 시대의 교회는 신조에 대한 신중하고 엄격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각성해야 하게 된다.

이 시대의 개혁 교회들이 너무도 중요하지만 어려워서 가르쳐지지 않고 망각되고 있는 교리들을 다시금 성도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래서 다양하게 공격해 오는 배도의 도전을 방어해야 한다.


이것만이 이 시대의 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력히 호소하고 싶다.


글쓴이: 회복의교회 김민호 목사

출처:  http://cafe.naver.com/reformedfo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