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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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을 살펴보자.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제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출애굽기20:17)

 

십계명의 마지막 10계명은 어떤 목적으로 주셨는가? 첫째 계명부터 아홉 번째까지의 계명이 인간의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었던 반면에 마지막 제10계명은 행동이 아닌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칼빈은 이 계명의 목적을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우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망을 모두 마음속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웃의 손해를 초래할 만한 탐욕을 우리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생각이 엄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 대응하는 것은 반대되는 교훈이다. , 우리가 계획하며 숙고하며 결심하며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여기서는 같은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을 제어하라고 명령하신다. , 우리의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타락한 생각이나 비틀어진 생각이 전혀 생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노나 증오심이나 음란이나 강탈이나 거짓말 등으로 기울며 끌려드는 것을 금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는 거기에 다시 자극을 받는 것까지 금하신다고 가르친다.

 

열 번째 계명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며, 행위가 아니라 태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는 욕망을 다 채우기 전에, 아홉 번째 계명을 어긴 것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향한 욕망을 다 채우기 전에 그는 일곱 번째, 여덟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계명을 어긴 것이다. 아모스 시대의 탐욕에 가득 찬 장사꾼들은 소유하기를 원하는 탐욕 가운데서 네 번째와 여덟 번째 계명을 어기고 말았다. 예레미야 당시의 유대 백성들이 그들의 욕망을 신성시하고, 또 물질과 세상적인 번영만을 추구한 나머지, 첫 번째, 세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 계명을 범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성전을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 말미암아 두 번째 계명도 어기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기 위해서 부모를 치는 자식들이나 부모를 저주하는 자들은 다섯 번째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지었다. 이렇듯 열 번째 계명은 모든 계명들을 요약한 것, 즉 이 계명을 범하는 것은 다른 계명 모두를 범하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탐심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대상을 갖고 싶어 하고 또 구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성경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로새서3:5) 사도 바울은 이 탐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왜 탐심이 우상숭배와 같은 죄를 짓는다고 말씀하시는 걸까? 매튜 헨리는 탐심은 곧 현세적인 복과 외적인 즐거움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이다. 탐심은 영적인 우상숭배이다. 왜냐하면 마땅히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사랑과 관심을 세상적인 부에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이 범한 죄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사례들을 보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탐심의 죄는 짓지 않았다. 죄를 죽이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만일 우리가 죄를 죽이지 못하면 죄가 우리를 죽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순종치 아니하는 자식들에게 임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성도들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랑해야하는데 탐심은 성도들이 그러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우상숭배인 것이다. 우리가 십계명을 보아오면서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옆에 두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며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이미 말했듯이 탐심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하기에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탐심은 말세가 될수록 더욱 심하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디모데후서3:1-4)

 

말세에는 사람들의 탐심으로 인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쾌락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일들이 아닌가? 남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기 위해 탐심에 젖어 있으며 남보다 더 즐거운 쾌락을 누리기 위해 탐욕적으로 행하는 모습들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일들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회개해야 한다.

 

2. 탐심은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이 탐심을 가지는 이유는 현재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 자족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은 하나를 가졌는데 이웃들은 두 개 세 개를 가지고 있음을 보고 불만이 차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가지고자 하는 탐욕이 생겨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 사건은 모두 인간의 탐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만일 만족하다면 탐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가지기 위해 악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탐욕에 빠져 광야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는 사건이 있다. 민수기 11장이 바로 그 사건이다. 이 사건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만 먹음에 불평을 가져 자신들이 종살이 했었던 애굽을 회상하면서 거기서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며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민수기11:5,6) 라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백성들의 원망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엄청난 수의 메추라기를 공급하심으로 배불리 먹게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불평한 죄에 대해서는 큰 재앙을 통해 심판하셨다,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민수기11:33,34) 이 사건의 결론은 34절에 말씀하셨듯이 탐욕을 낸 백성들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만나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탐욕이 있으면 만족 할 수가 없다.

 

3. 범사에 감사하며 자족하라.

탐심을 버리는 길은 자족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서4:11,12) 바울은 자신이 궁핍을 겪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은 지극히 적은 것으로 만족했으며 또 그것이 자신을 만족케 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자기에게 공급해 주실 것을 믿음으로 만족했다는 사실이다.

 

지혜자 솔로몬의 말처럼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 탐욕적인 마음이다. 인간은 자족하지 않으면 항상 불만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가졌다고 해도 또 다시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항상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구하지만 성도는 자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자족하는 방법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를 가졌어도 감사하는 자가 되면 두 개 다섯 개를 가진 자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그것을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지 않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시내산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을 첫 계명부터 살펴보아 왔다. 모세의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고 언약 관계에서 결정적인 요소를 형성하였다. 또한 이 계명은 다른 어떤 계명들과도 구별된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며, 하나님의 인격이 담겨 있고 그분이 요구하시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십계명은 도덕법이다. 도덕법은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영원토록 그것에 복종케 한다. 그리고 그 법 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리 때문에서라도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폐하신 율법 가운데 도덕법인 십계명은 포함되지 않는다. 폐하여진 율법은 의식법(제사 제도와 정결 의식이나 절기)과 시민법(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법)은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도덕법인 십계명은 폐지된 것은 아니다. 물론 십계명을 지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하며 우리 죄를 알게 하며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영원한 도덕법인 것이다. 십계명을 무시하는 자들은 참된 성도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