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유대주의 기독교의 구원론과 종교개혁적 구원론

by 쥬니어칼빈 posted Oct 0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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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유대주의 기독교의 구원론과 종교개혁적 구원론

 

김영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조직신학)

 

 

머리말

 

샌더스(E. P. Sanders), 던((James Dunn), 라이트(N. T. Wright) 등 오늘날 유대주의 경향의 신약학자들은 이천년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있었던 구원론 논쟁을 재현하고 있다. 이들은 1세기의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요,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 들어 있었으며, 구원의 길에 들어갔으며, 율법의 행위를 부정하는 바울의 이신칭의 논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바울에게서 “의로움의 전가”와 “유효한 칭의“를 구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적 칭의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소위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바울의 율법 이해에 대한 근거들을 유대주의에서 얻어내고 있다. 이들은 제2차 성전전축 이후의 유대주의에 대한 재검토를 시도한다. 샌더스는 제2성전시대(BC 200-AD 200)의 다양한 유대교 문헌들(Ben Sirach, I Enoch, Jubilees, The Psalms of Solomon, IV Ezra, the Dead Sea Scrolls)에 근거하여 1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주의적 종교라는 전통적인 시각이 잘못된 것임을 주장한다. 그는 1세기의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이며, 율법순종은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것임을 주장하면서 갈라디아 교회 내의 유대주의적 기독교를 오늘날 구원론에 있어서 복권시키고자 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이러한 새 관점 제창자들의 주장이 현대판 유대주의적 기독교 구원론이라는 것을 바울 서신의 맥락에서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언약적 율법주의는 근본적으로 행위구원적 율법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종교개혁자들의 칭의 해석이 바울의 바른 해석이며, 기독교의 근본진리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I. 현대판 유대주의적 기독교: 반(半)펠라기우스주의

 

1.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 유대교에 대한 재해석, 현대판 유대주의적 기독교

 

옥스퍼드의 신약학자 샌더스는 루터가 바울을 전통적으로 이해한 것 같이 1세기의 유대인들이 조상들처럼 자신들의 의로움이나 행위에 의해서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본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는 기준을 가지고 살았으며. 이것이 당시 유대주의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계획 안의 한 사람의 위치는 언약의 기반 위에 세워지며 언약이란 인간의 적절한 반응으로서 계명에 대한 그의 순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미 유대인들은 언약적 율법을 통해서 은혜를 전제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사도 바울의 증거를 약화시키고 있다.

 

샌더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갔으므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은혜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신다.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의의 공로를 전가받을 필요가 없어진다. 언약적 성실함을 지켜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율법을 어긴 자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주어질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2. 던의 율법과 율법행위, 하나님의 의에 대한 재해석: 사회학적 접근

 

제임스 던(James Dunn)은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바울의 율법과 율법행위 비판을 이방인의 선교현장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던은 바울이 율법과 율법행위를 비판했을 때 언약적 유대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유대민족의 정체성 역할을 하는 할례와 유대 음식법, 절기법을 비판하였다고 본다. 바울은 이방선교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유대인의 민족적 우월감과 배타사상을 가져오게하는 율법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란 이러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 뜨리고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율법은 여전히 유대인들의 자기 정체성과 구원의 보루가 되어 이방인과 유대인의 동등성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행위를 반대한 것으로 본다.

 

던은 “하나님의 의” 개념을 헬라적인 개념에서 찾지 않고 히브리적 개념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관계적 개념”(relational concept)으로 이해한다. 던은 칭의론에서 “하나님의 의”를 택한 백성들을 향한 언약관계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으로 본다. 하나님의 의는 비록 그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인도하시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언약적인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심이다.” 던은 하나님의 의를 심판의 의가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의무를 지시는 신실하심으로 이해한다.

 

던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 개념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개념을 사랑 개념 안에 흡수시키는 현대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손상된 의를 세우는 의다. 의로움이란 관계성이다. 그래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없어도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을 지키신다. 이것은 유대주의적 의 개념이다.

 

3. 라이트의 언약 백성론: 하나님의 의와 믿음에 대한 재해석. 교회론적 접근

 

라이트(N. T. Wright)도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수용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언약 참여자의 새로운 표시로서 해석한다. 그는 복음의 믿음을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샌더스나 던과 같이 로마서 4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언약 회원은 하나님 앞에 의인(義人)으로 분류되기에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칭의론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라이트는 바울이 말하는 의를 언약적 성실성(covenantal faithfulness)과 동시에 언약적 회원권(covenantal membership)으로 해석한다. 그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행위-의”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적 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해석한다.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 교리를 언약회원권에 대한 교리라고 본다.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구원론적 주제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언약적이고 교회론적 주제라고 해석한다.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의 유대교 비판은 “이스라엘의 민족 중심주의적 언약주의”이지 율법 행위를 통해 구원얻는 펠라기우스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라이트는 루터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은혜의 조건으로 지시된 행위를 믿음으로 대체했다고 비판한다.

 

II. 종교개혁신학적 비판

 

새 관점 제창자들은 바울에 대한 언약적 율법주의의 맥락에서 한결같이 칭의론과 구원론이 바울 복음의 주제가 아니라 부제라고 본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얻는 복음의 진리는 유대교적 율법적 언약 이해와 언약 준수의 언약적 율법주의 안에서 부제가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바울이 말하는 종말론적 심판날에 우리를 심판하는 율법의 정죄와 심판의 성격이 탈락되어 버린다.

 

1.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구원론적 주제: 율법 준수냐 그리스도의 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 사이에 택일

 

1) 언약적 율법주의는 행위구원적 율법주의

 

샌더스는 기독교가 유대교를 율법주의, 인간 중심적 공로주의 종교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 종교라고 본다. 샌더스는 언약이란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고, 율법주의는 율법 순종의 요구, 즉 그 관계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은혜로 택하시어 언약관계로 들어가게 하셨다. 그 언약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율법순종이 필요조건이다. 구원이 순종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불순종에 의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새 관점 제안자들의 주장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율법의 행위는 그 자체로 구원의 수단이 아닌 언약 백성의 지위를 유지하는 방법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달렸으므로 유대인들에게 은혜의 개념이 있었다고 본다. 샌더스는 이것을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바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선택을 받은 백성임을 강조하고 자기 의를 지키려는 행위 구원주의로 빠지고 있는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율법의 이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머물고자하고 구원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행위 구원적 율법주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샌더스의 주장인 언약적 율법주의 사상은 초대 갈라디아 교회에 일어난 유대주의적 기독교 사상의 현대판 등장이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현대판 유대주의적 기독교다.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적 기독교는 율법도 지키고 그 테두리 안에서 그리스도도 믿고자 한 것이다. 바울의 관점, 즉 메시아의 오심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1세기의 유대주의는 비록 율법을 언약으로 파악하였다 하드라도 여전히 은혜와 율법의 공로를 혼동하는 오류에 처하고 있다: 바울은 갈1;6에서 갈라디아 교회 유대주의적 기독교인에 의한 복음의 왜곡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갈라디아 교회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은 다음 귀절에서 분명하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3).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고자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샌더스의 주장- 사도 바울이 율법준수에 대하여 비난하거나 부정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는 주장-은 갈라디아서에 있는 바울의 서신에 모순되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 자체는 선하나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의 전적 타락 때문에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로마서 7장 14절에서 바울은 “율법은 신령하다”고 말한다. 16절에도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고 있다.” 샌더스가 놓치고 있는 것은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선한 율법을 행치 못하는 인간의 죄성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 언약의 율법은 유대인의 자기 공로로 말미암아 정죄의 율법이 된 것이다.

 

2) 칭의 교리가 이방선교를 낳았다.

 

새 관점 주창자들은 이신칭의 교리가 바울 복음의 필수적인 내용에 해당한다기보다 바울의 이방선교 현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확립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회론 및 선교론적 산물임을 주장한다. 결국 새 관점 제창자들은 1세기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있지 않았고, 바울의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주제가 아닌 교회론적 주제였다는 두 가지를 주장한다. 특히 던은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를 비판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구원의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유대인들의 독특한 민족적, 종교적 표지로 작용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마련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동등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신칭의의 복음은 갈라디아서에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의 초창기부터 그의 선포의 주제였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1-17).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칭의의 복음이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기원하고 있으며, 이 칭의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 자신의 증언은 사도행전에 있는 바울의 회심기사와 일치한다: 아나니아가 회심한 바울을 영접하기를 꺼려 할 때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사도행전 26장에 있는 아그립바와 베스도 앞에서 바울이 자신의 다메섹에서의 신앙의 체험을 증언할 때에도 이방인 선교에 대한 사명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행 26:17).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 26:23).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은 처음부터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음으로써 오는 하나님의 의였다. 이것은 유대주의자들을 대적하기 위하여 고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방선교가 이신칭의 낳은 것 아니라 이신칭의가 바울의 이방선교 낳았다”고 보아야 한다.

 

2. 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의를 간과

 

1) 죄의 보편성 간과

 

던의 해석에 의하면 바울의 칭의 교리는 그의 복음의 핵심이기 보다는 이방선교의 현장에서 유대인들의 정체성 역할을 하고 있는 율법, 할례, 유대 음식법 등을 선교의 걸림돌로 제거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강조하기 위한 사회적 기능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던의 논리에 따르면 이미 유대교적 언약적 율법에의 신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받음으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칭의를 받을 필요성이 없어진다. 이러한 던의 주장은 죄의 보편성을 간과하고 있다. 던은 1세기 유대인들도 원죄에 의한 인류의 보편적인 죄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가졌다는 특권적 신분의식에 빠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던은 루터를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의로운 심판의 용어가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의무를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던은 로마서 1;16-17에서 하나님의 의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면서 자신에게 부과하셨던 의무를 실행한 신실하심으로 본다. 던은 하나님의 의란 자신의 백성이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을 건지시고, 구원하시고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신실하심이라고 말한다. 던은 “바울이 죄의 책망을 위해 혹은 유죄에 대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설교한 증거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고린도 후서 7;9-19절과 12장 21절에서 죄의 질책에 대한 것은 없다고 한다. 여기서 던은 하나님의 의를 오로지 사랑의 의로만 간주하고 루터가 발견한 공의로운 의(심판하시는 의)라는 차원은 간과하고 있다. 던은 구원의 시작이 언약의 회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죄에 대한 책망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를 신뢰하는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의무를 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한 의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의 필요성이 없어진다. 구약적 의 개념(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서 신약적 하나님의 의 개념(그리스도의 공로의 의)은 사라진다.

 

2) 심판과 정의의 의 탈락

 

던은 로마서 4장에서 율법행위를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던의 바울 해석은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유대주의적 기독교로 왜곡하고 있다. 던의 율법 이해에는 심판의 기능이 없다. 이에 반하여 사도 바울은 율법의 정죄기능을 칭의 교리의 기본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개혁신학은 심판과 정의의 의와 용서와 사랑의 의를 구분한다. 율법주의에서는 심판과 정의의 의가 있다.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이것은 구약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범죄한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심판이다. 던은 이 두 가지 의의 구분을 간과하고 있다. 복음에는 사랑과 용서의 의가 있으나 먼저 심판과 정의의 의 앞에서 절망한 자만이 루터가 말하는 바같이 숨어계시는 하나님에게서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 앞으로 도피하게 된다.

 

3. 라이트: 하나님 백성과 언약 개념 왜곡

 

1) 새로운 하나님 백성 개념: “신령한 이스라엘” 간과

 

라이트는 “하나님 백성”을 정의(定義)함에 있어서 1세기 맥락을 말하면서 하나님 백성이란 구원의 체계가 아니라 언약 회원권(covenant membership)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이 율법과 율법행위를 비판한 것은 원(原)펠라기우스주의(proto-pelagianism)나 도덕주의를 비판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중심적 언약주의(ethnocentric covenantalism)를 비판하였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바울이 율법의 행위라는 용어 아래서 공격하는 것은 선행으로 의와 구원을 얻으려는 원(原)펠라기우스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백성”이란 개념을 단지 유대인의 배타적 민족주의로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입으려 하는 율법행위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로마서 주제 귀절인 1장 16-17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의는 유대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의요 하나님의 백성의 의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칭의의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해당하며, 이 칭의는 믿음의 의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주되어진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유대주의적 혈통적 굴레를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신령한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다.

 

2) 십자가 대속의 새 언약 간과: 유대주의적 언약 개념에 지배

 

새 관점의 제창자들에게 이신칭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가와 관련된 구원론적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회론 혹은 에큐메니칼적 주제다. 이러한 라이트의 바울 해석은 유대주의적 언약이해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라이트는 이신칭의를 두 단계로 나눠 설명하기도 한다. 먼저는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자신의 백성으로 선언하는 단계이며, 다음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개인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 성령이 모든 삶을 근거해 그를 최종적인 자신의 백성으로 선언하는 단계이다. 결국 칭의와 성화를 하나의 칭의 교리 안에 통합시킨 셈이다. 이것은 칭의와 성화를 절반씩 인정하여 결합시키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적 시도이다.

 

이러한 라이트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의 의를 유대주의적 언약의 틀에서 해석함으로써 십자가의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의를 간과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의 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의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III. 칭의의 복음은 기독교회의 주춧돌이다.

 

샌더스, 던, 라이트 등 새 관점 주창자들은 구원은 은혜를 통하여 받지만, 심판은 행위에 의거하여 행해지며, 행위는 구원을 획득하는 조건이 아니라 구원 안에 머무르기 위한 조건임을 주장하면서 바울의 종교와 랍비적 유대교의 양식이 일치함을 주장한다. 이들이 유대교 안에 있는 언약적 요소를 발견한 점은 공헌이다. 그러나 새 관점 제창자들은 언약적 율법 준수(遵守)가 구원과 의를 가져다준다고 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무력화 시킨다. 그리하여 바울이 전한 이신칭의의 복음을 언약적 율법 준행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칭의의 복음은 바울이 천명하고,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바울의 복음을 바르게 해석한 것 같이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기초석이다.

 

1. 칭의론은 성화론과 혼동 될 수 없다.

 

언약적 율법의 준수가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가 구원을 가져다준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유대주의 성향을 지닌 극단적인 유대주의적 기독교인으로서 떠돌아다니는 선교사들”을 “거짓 형제”라고 정죄하였다. 루터는 갈라디아 강해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로워졌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 없이 된 것이 아니다”는 것은 거짓 사도의 주장이라고 선언한다.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적 기독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라“고 그 비판의 이유를 말한다.

 

새 관점 제창자들이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율법 자체가 정죄가 아닌 언약이요, 언약에 거함이란 하나님 백성 신분의 보증이요, 율법의 지킴이란 자신의 의와 공로를 쌓는 것이다. 신명기적 언약 패턴에 따라 순종의 행위가 의와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없애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필요 없게 된다.

 

바울은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분명히 율법준수를 통한 의로움은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이러한 바울의 율법주의에 대한 통찰은 어려서부터 랍비적 유대교의 두 산맥 가운데 하나인 힐렐학파에서 훈련받았으며, 랍비적 유대교 체계 안에서 수십년을 연구와 실천에 몸담았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그가 다메섹 사건 후에 도달한 결론이다. 이 통찰은 다메섹에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하신 계시에 대한 경험에 근거하여 여태까지의 유대교적 율법주의에 대한 깊은 내면적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칭의는 율법 준수라는 성화를 통하여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언약된 백성의 직분과 성화는 단지 언약적 율법에의 신실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고린도 전서 1장 30절;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를 근거로 하여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의로우심의 전가를 말하고 있다. 1539년 칼빈은 『기독교강요』제 3권 16장 1항에서 칭의론의 구조를 정립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로움과 지혜와 성화와 구속으로 주어졌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의롭게 하시는 바, 동시에 거룩하게 만든(iustificat.. simul sanctificat) 자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칭의와 성화는 인간의 공로나 업적으로 세워야할 종교적 성취가 아니다. 이 둘은 구별은 가능하지만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중적인 은혜(duplex gratia Dei)이다.

 

2. 인간의 전적인 타락, 하나님의 심판과 죄의 용서가 선포되어야 한다.

 

현대판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에게 의로움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은 바울이 말한바 율법이 주어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적 부패성을 간과하고 있다. 율법은 언약의 율법으로 그 자체는 신성하나, 이스라엘이 자신의 의로 율법을 지키고 스스로 공적을 쌓으려고 할 때 그 율법은 우리의 죄성을 고발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하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칭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의의 전가는 라이트가 추론하는 것처럼 의의 주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돌려지는 법정적인 의(forensic righteousness)다. 의의 전가는 의로 “간주되었다”(έλοϒίσθη)는 뜻이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간주하셨다는 것이다.

 

3. 율법은 더 이상 구원을 주는 언약이 될 수 없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율법 준수가 우리를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 준수가 우리를 종말론적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구원의 충족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올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갈 3:21-22). 그러나 율법은 실상(實狀) 우리를 심판 날에 정죄로 이끌 뿐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죄 속에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언약의 율법은 유대인들일찌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선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자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언약의 율법의 효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며 그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선생의 역할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3-24).

 

4. 종말론적 심판의 진지성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 준수를 견지하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로서 믿음에다 선한 행위를 요청하는 중세의 가톨릭의 공로주의에 빠진다. 이들은 율법의 순종에 따른 최종 구원을 보장받으려고 한다: 샌더스는 “유대인의 의가 율법을 통하여 온다”는 사실을 바울도 인정한다고 해석한다: “바울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에게 있어서의 의는 토라에 순종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토라의 순종이란 토라를 아무리 언약으로 간주하드라도 율법준수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길과는 대립된다. 율법 준수의 길은 이신칭의 길과는 대립된다.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하나님의 의를 유지하기 위한 율법 준수는 결국 행위구원의 율법주의에 빠진다.

 

그리하여 언약적 율법주의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정죄 앞에 심판당하여 종말론적 심판에 견디지 못한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쌓은 진노에 대하여 언급한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이 심판의 날은 심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이 종말론적 심판 날에 피할 수 없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0하-12).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종말론적 심판의 심각성을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최종의 심판대 앞에서 직고(直告)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맺음말

 

샌더스, 던, 라이트 등 새 관점 주창자들은 오늘날의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언약적 율법주의를 제창하면서 율법의 언약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장한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부수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유대주의자들의 신인협력주의(그리스도 믿음과 율법 지킴)를 다른 복음을 쫓음이라고 비판하면서 오로지 이신칭의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새 관점 주창자들은 오늘날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사이비 복음(현대판 구원론)의 거짓 선지자들이다. 언약적 율법주의도 그 실상에 있어서는 언약에 대한 믿음에다 자기 율법 행위에 근거한 신앙을 그리스도 신앙에 더붙이기 때문에 반(半)펠라기우스주의의 공로 신앙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후퇴요, 복음의 변질이다. 율법이 언약으로 하나님의 의를 보장하고, 율법의 순종이 그의 백성됨을 보증하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화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주제어: 이신칭의, 언약적 율법주의, 행위구원, 율법행위, 반(半)-펠라기우스주의

Key-words: Justification, covenantal nomism, work-salvation, semi-pelag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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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샌더스(E. P. Sanders), 던((James Dunn), 라이트(N. T. Wright) 등 오늘날 유대주의 경향의 신약학자들은 이천년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있었던 구원론 논쟁을 재현하고 있다. 1세기의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요,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 들어 있었으며, 구원의 길에 들어갔으며, 율법의 행위를 부정하는 바울의 이신칭의 논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바울에게서 “의로움의 전가”와 “유효한 칭의“를 구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적 칭의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의 바울 해석은 현대판 유대주의적 기독교요, 반(半)펠라기우스주의이다.

 

샌더스는 유대교에 대한 재해석으로서 언약적 율법주의를 제창한다. 이것은 현대판 유대주의적 기독교이다. 던은 사회학적 접근을 하면서 율법과 율법행위, 하나님의 의를 재해석한다. 라이트는 교회론적 접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의와 믿음에 대한 재해석한다.

새 관점 제창자들은 언약적 율법주의의 맥락에서 한결같이 칭의론과 구원론이 바울 복음의 주제가 아니라 부제라고 본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되고 구원얻는 복음의 진리는 유대교적 율법적 언약 이해와 언약 준수의 언약적 율법주의 안에서 부제가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바울이 말하는 종말론적 심판날에 우리를 심판하는 율법의 정죄와 심판의 성격이 탈락되어 버린다.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구원론적 주제이다. 따라서 칭의 교리는 율법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 전가(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를 가르친다. 샌더스가 제시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행위구원적 율법주의에 머문다. 칭의 교리가 이방선교를 낳았다. 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의를 간과하고 있다. 그는 죄의 보편성을 간과하고 심판과 정의의 의를 탈락시키고 있다. 라이트는 하나님 백성과 언약 개념을 왜곡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하나님 백성 개념인 “신령한 이스라엘”을 간과하며, 십자가 대속의 새 언약을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유대주의적 언약 개념에 지배된다. 칭의의 복음은 기독교회의 주춧돌이다. 1. 칭의론은 성화론과 혼동 될 수 없다. 2. 인간의 전적인 타락, 하나님의 심판과 죄의 용서가 선포되어야 한다. 3. 율법은 더 이상 구원을 주는 언약이 될 수 없다. 4. 종말론적 심판의 진지성이 견지되어야 한다.

 

(English Abstract)

 

The judaistic New Testament scholars such as E. P. Sanders, James Dunn, and N. T. Wright have re-presented the controversy of soteriology that occurred at the Galatian church in the first century. Sanders has suggested a covenantal nomism as a reinterpretation of the judaism. This is judaistic Christianity in a modern version. Dunn has reinterpreted the law, the behavior of law and the righteousness of God, by making the sociological approach. Wright has reinterpreted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faith, by making the ecclesiological approach. These scholars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ltogether have viewed in the context of covenantal nomism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the soteriology are not the subject of the Pauline Gospel but a subtitle. The truth of the Gospel that gives salvation, and justification by believing in Jesus Christ becomes a subtitle in the context of covenantal nomism of the understanding of judaistic norm and covenant observance . So, the character of legalistic condemnation and judgement which will judge us at the eschatological day shall be falling away. The core of Pauline message is the soteriological subject. Therefore, the doctrine of the justification does not teach the law observance but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Covenantal nomism Sanders suggests remains the nomism of behavior-salvation. The doctrine of the justification gave birth to the pagan mission. Dunn disregards the righteousness of God's just judgement. Dunn makes the justice of judgement and justice falling away, disregarding the universality of sin. Wright distorts the concept of God's people and covenant. He disregards the new covenant of cross redemption, disregarding the spiritual Israel, which was the new people of God. He is dominated by judaistic covenant. The Gospel of justification is the corner stone of the Christian church. The doctrine of the justification and the one of the sanctification should not be confused. The total depravity of humans, the judgement of God, the forgiveness of sins should be preached. Law can not be the covenant giving the salvation. The seriousness of the eschatological judgement should be kept.

 

출처: 한국개혁신학회 제28회 정기학술심포지엄/2010년 5월 8일/ www.reformedth.com